국사/조선

우리나라의 위대한 어머니 신사임당

윤여시 2015. 5. 28. 23:20
반응형

우리나라의 위대한 어머니 신사임당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어머니가 누구입니까?'라고 물어보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어머니 대신 신사임당을 대답할 것이다. 조선을 대표하는 대학자이자 신사임당의 아들 율곡 이이가 5천원 지폐에 그려졌다면 그를 키운 신사임당은 여성 위인 최초로 5만원권 지폐에 초상화로 그려지며 위대한 여인으로 꼽히고 있는데 그녀는 누구일까?


신사임당 초상화


 |신사임당의 출생


신사임당은 1504년 10월 29일 강원도 강릉 북평촌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신사임당의 어머니인 이씨 부인은 생원 이사온의 딸로 강릉 참판이었던 최응현의 외손녀였는데, 그녀는 외동딸로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외할아버지에게 학문과 글을 배워 똑똑한 여성이었다. 이후 이씨부인은 한성에 살고 있는 선비 신명화와 결혼을 하였다.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는 멀게는 고려 태조 왕건을 도운 개국공신 신숭겸의 자손으로 중종때에 과거에 여러차례 낙방하였고 그의 장인 이사온이 머물고 있는 강릉과 과거시험을 보러 한성을 오가며 과거시험을 봤다. 


신사임당은 이씨부인과 신명화의 두 번째 딸로써 그녀의 본명은 신인선이었다. 신사임당의 어머니 이씨부인은 당시 사회에서 칠거지악중 하나였던 아들을 낳지 못하였고 내리 다섯명의 딸만 낳았다. 


배우 이영애가 출연하는 신사임당


 |신사임당의 유년시절


신사임당은 어려서부터 글과 그림의 재능이 특출났는데 특히 그녀의 외할아버지 이사온은 당시 조선사회의 여자를 하찮게 여기는 생각에서 벗어나 남자든 여자든 모두 배움은 필요한 것이라 생각해 손녀들에게 글을 직접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신사임당은 어려서부터 자수는 물론 바느질 솜씨도 뛰어났으며 학문과 그림 어느 하나 빠지는게 없었다. 특히 그림에 뛰어난 모습을 보여 어릴 때부터 그림을 정식으로 배웠고 그 재능을 알아본 외할아버지 이사온이 조선초기 최고의 화가중 한명이었던 안견의 그림을 사다주었을 정도라고 한다.


그의 아버지 신명화는 이때 거의 대부분을 강릉이 아닌 한성에 있었기 때문에 신사임당의 교육에는 많이 참여하지 못한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그녀가 있기까지는 외할아버지 이사온의 영향이 컸다.


오만원권 지폐의 신사임당 초상화

   

|신사임당의 결혼


신사임당이 열아홉살이 될 무렵 그녀는 스스로 호를 사임당이라고 지었는데 여기서 '사'는 본받는다는 뜻이고 '임'은 옛날 중국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문왕은 주나라를 세운 왕으로 어질고 슬기로운 임금으로 손꼽히는 사람이며 주왕의 곁에는 항상 어머니 태임의 훌륭한 교육이 뒷받침되어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무렵 신사임당은 부모의 뜻에 따라 1522년 열아홉살의 나이로 덕수 이씨 가문의 이원수와 결혼을 했다. 사실 신사임당의 부모가 이원수를 사윗감으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보다 신사임당의 재능을 키워줄 수 있는 인물과 가문이라는 판단이었고 시집살이를 시킬만한 사람도 없어서 신사임당의 친정에 그대로 머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혼 후 그 해 아버지 신명화는 마흔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신사임당은 친정에 남아 아버지의 삼년상을 마치고 남편 이원수를 따라 한성으로 떠나게 된다. 신사임당이 한성에 오자 이원수의 친구들이 신사임당의 그림솜씨와 글솜씨를 보고자 작품을 부탁 할 정도로 당시 조선 사회 여성에게는 찾기 힘들었던 대접을 받았다. 


신사임당의 아들이자 조선시대 대학자 율곡 이이

 

|신사임당 이이를 낳다


신사임당의 첫번째 아이는 결혼 2년 만에 22살의 나이로 낳은 맏아들 선으로 이후 남편 이원수의 고향인 파주 율곡리에서 여러해 머물기도 했다. 사임당은 26살에 두 번째 딸 매창을 낳았으며 신사임당의 재능과 외모를 그대로 이어 받아 작은 사임당이라고 불렸다고 전해진다. 이후에도 신사임당은 둘째 아들과 둘째 딸을 낳았다.


그리소 신사임당이 서른세살 되던 해 그녀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경포대를 거닐던 신사임당에게 바다 한가운데에서 찬란한 빛이 솟아오르더니 선녀로 변해 신사임당에게 다가온 것이다. 선녀는 품에 있던 아이를 신사임당에게 건네주며 꿈에서 깼다. 또 이후에는 검고 큰 용이 바다 한가운데에서 솟아 오르더니 신사임당이 있는 방안으로 들어왔는데 얼마 후 신사임당이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율곡 이이다. 


율곡이이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함은 물론 그 효성이 깊어 그가 태어난 강릉에 소문이 자자 했으며 신사임당도 유독 아낀 아들이었다. 이후 신사임당이 38살이 되던 해 그녀는 홀어머니를 떠나 남편이 있는 한성으로 가야 했고 그의 어머니에게 바치는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본다>라는 시를 지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길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신사임당은 한성으로 돌아와 지금의 수송동과 청진동 일대에 살았는데 그녀는 한성에 와서도 친정어머니를 그리며 <어머니 그리워>라는 시를 짓기도 한다.


산 첩첩 내 고향은 천리이건만

자나깨나 꿈 속에도 돌아가고파.

한송정 가에 외로이 뜬 달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

갈매기는 모래 위에 흩어졌다 모이고

고깃배들 바다 위로 오고 가리니.

언제 또 강릉길 다시 밟아 가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 할꼬.


친정에 대한 그리움을 뒤로하고 신사임당은 자녀들 교육에 매진 했는데 소사임당이라 불린 큰 딸 매창은 어머니 그림을 그대로 닮아 <달과 매화>, <참새와 대나무> 등의 그림을 남겼고 이율곡은 더 말할 것 도 없는 대학자가 되었으며 막내 아들 이우는 거문고, 글씨, 시, 그림 등에 천재적인 기질을 발휘했다고 전해진다.

 

 

신사임당의 예술

 

|신사임당의 예술

 

신사임당은 이율곡의 어머니이자 현모양처로 더 큰 주목을 받고 있지만 만약 그녀가 현대에 존재했다면 유명 여류 화가로 남아 있을 정도로 당대에 이름을 알린 화가였다. 대표적으로 그녀의 작품 초충도는 꽃과 나비 등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여 지금까지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녀의 그림들이 얼마나 현실성이 있었으면 실제로 닭이 살아있는 벌레인 줄 알고 쪼아 먹었다는 일화도 내려오고 있으니 말이다.

 

그녀의 수많은 작품에서 현대까지 이어져 오는 작품은 얼마 없지만 많은 후세의 예술가들이 다 그녀의 작품을 보고 극찬을 했다니 그 예술성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 수 있을 듯 하다. 때문에 어쩌면 그녀를 존경하는 이유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현모양처여서가 아니라 또는 율곡이이를 키운 어머니여서가 아니라 조선시대에는 찾아볼 수 없는 한명의 여류 예술가로서 존경 받아야 할 위인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