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벌의 꿈 봉림대군 효종 그는 누구인가?
조선의 왕 중 당시 중국의 명나라나 청나라를 치겠다는 생각을 한 왕이 있었을까? 혹자는 그릇된 꿈이라 할 수도 있으나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평생을 준비했던 왕이 있었다. 그가 바로 봉림대군 효종이다.
|효종의 어린시절과 청나라 생활
2014/12/01 - [국사/조선] - 안타깝고 비극적인 이야기 소현세자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1619년에 태어났다. 그가 4살때인 1623년에 인조가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면서 왕자의 신분인 봉림대군으로 승격 되었다. 일찍부터 인조의 장남이자 7살 위인 소현세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왕위와는 상관 없는 존재였으나 효종 역시 인조와 닮은 면이 있었고 효심이 지극해 인조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고 전해진다.
봉림대군이 18살이 되던 해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항복이라는 치욕을 맛봤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야만 했는데 모두 알다시피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우수한 문물과 천주교 선교사들을 만나 식견을 넓혔다면 봉림대군은 오직 청나라에 대한 복수심을 앞세워 반드시 복수하겠다는 생각을 다잡는다.
하지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생각은 달랐으나 우애가 특히 돈독했으며 타향살이를 하면서 서로를 의지하며 설움을 견뎌냈다고 전해진다. 또 봉림대군은 청나라에서 아들도 얻었는데 그가 바로 자신의 뒤를 이어 왕이 되는 현종이다. 여튼 시간이 흘러 청나라에 온지 10년이 다되가는 1645년 형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모두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이 다가 오게 되었는데 먼저 조선으로 떠난 소현세자가 급사하자 봉림대군이 뒤를 이어 돌아오게 된다.
<꽃들의 전쟁> 효종
|효종의 즉위
봉림대군이 조선으로 돌아오자 원래 소현세자의 아들 석철이 왕위에 올라야 함에도 소현세자를 싫어한 인조로 인해 세자자리를 물려 받게 된다. 이후 4년뒤인 1649년 인조가 세상을 떠나자 봉림대군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니 효종이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당시 권세를 자랑하던 김자점 무리를 견제하기 위하여 송시열을 비롯한 당시 비공신세력들을 적극 영입하기 시작했고 대동법을 실시하며 왕권강화와 나라 안정에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장남이 아닌 차남이 왕위에 올랐다는 아킬레스건이 있었고 특히 그의 형 소현세자와 그의 부인 세자빈 강씨 그리고 그 아들들이 인조에 의해 억울하게 몰락했다는 약점이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세자빈 강씨의 억울함에 대한 상소와 함께 신원을 해야한다는 김홍욱을 필두로 한 신하들의 주장이 거세게 일어나자 효종은 김홍욱을 장사(때려죽임)시키고 만다. 이는 효종이 갖고 있던 차남이 왕위를 이었다는 약점을 인정하는 사건이었다.
|효종의 북벌론
효종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약점과 청나라에 대한 복수만이 자신을 완전한 왕으로 만들것이라 생각해 재위기간 내내 북벌에 매달렸다. 때문에 효종은 군사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청나라를 정벌하겠다는 생각을 했고 이제까지의 학문을 중시하던 조선의 사상을 뛰어넘어 무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문무의 엄격한 구분을 짓는 것이 군사력 강화의 첫걸음이라 생각했고 박무를 병조판서에 임명 군비를 확장해나갔으나 과음에 의한 쇼크로 세상을 일찍 떠나게 된다. 이에 그는 군비 확장에 찬성하는 드문 문신이었던 원두표를 병조판서에 임명하여 군비를 확장시켜 나갔고 무신 이완에게는 어영대장을 임명하여 북벌계획을 준비해나가기 시작한다.
효종은 자신이 친히 군사들의 기예를 시험한 후 우수자를 임용하는 관무재를 복원하였고 여기에 합격한 인물들을 지방 수령으로 임명하여 지방군비 확충은 물론 군사력 강화에 직접적으로 나서게 된다.
효종은 이후에도 사대부들의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끝없는 군비확장 노력을 행했고 재위 6년만에 조선군 1만 3000여명의 조선군이 펼치는 열무식을 보게된다. 또한 청나라 정벌의 꿈을 이루고자 기병 양성을 위해 창덕궁 담장을 열어 기병 훈련소로 삼았고 마침 제주도로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을 훈련도감에 배속시켜 새로운 총을 제작하게 한다.
하지만 이같은 노력에 비례하여 당시 문신들의 반발이 컸고 군사로 충당할 인원들도 부족해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우암 송시열을 빼놓고 효종 시대를 거론할 수 없다.
|효종의 북벌론과 송시열
당시 군비확장의 반대를 가장 크게 외치던 사대부를 대표하는 우암 송시열은 효종의 북벌론과 그릇된 생각들에 대해 상소를 올려 돌직구로 비판한다. 그는 전쟁을 일으키는 북벌 대신 시국을 안정시키고 백성들의 살림을 살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당시 사대부들을 효종이 우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비판하며 효종이 반성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우암 송시열과 같은 당시 조선 사대부들에게 조선이란 나라는 임금의 것이 아닌 천하의 것이었으나 여기서 천하는 백성이 아닌 사대부들이라는 한계에 봉착하는 것이다. 즉 나라를 위하는 척 북벌은 반대하지만 결국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는 한계가 있다.
여튼 효종은 이러한 송시열의 상소를 보고 분개했겠지만 송시열은 당시 사대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하지 못했다. 때문에 효종은 자신의 북벌을 계속 이끌기 위해서 송시열에게 벼슬을 내려 그를 달랬으며 이는 효종의 정치적인 패배를 의미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송시열을 대표하는 산당세력들은 끝끝내 군비확장에 태클을 걸기 시작했고 효종은 자신의 한발 뒤로 물러서되 송시열을 이조판서 송준길을 병조판서로 삼아 인사와 군사에 관한 전권을 주고 북벌 추진까지 함께 넘기게 된다.
하지만 송시열을 비롯한 당시 조선 지배층들에게 이러한 북벌은 오직 효종의 생각일뿐이었으니 그 누구도 책임을 맡지 않으려 했고 송시열 역시 효종의 생각을 이용하여 자신의 생각하던 사대부의 나라를 만들려 했을뿐이었다.
|효종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처럼 권력까지 내주며 오직 북벌에 집착했던 효종이 예정에 없게 1659년 재위 10년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일각에서는 효종의 귀 밑에 종기가 심했는데 침의 신가귀가 침을 놓다가 잘못 놓아 승하했다고 전해지기도 하며 당시 북벌에 부담을 느낀 송시열을 대표하는 산당세력이 독살을 했다는 설도 돌았다. 실제로 효종의 시신에는 심한 부기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 역시 독살설을 뒷받침 하는 증거이다.
여튼 효종은 유언하나 제대로 전하지 못한채 죽음을 맞이했고 그의 죽음과 함께 그가 평생의 한으로 간직했던 북벌은 시작도 못한채 물거품이 되고 만다.
사실 당시 청나라와 조선의 국력을 비교할 때 전쟁 자체가 말이 되지 않을 정도로 한 군주의 허황된 꿈으로도 볼 수 있으나 조선왕들 중에서 사대주의를 벗어나 그나마 강력한 왕권을 통한 북벌의 꿈을 꾸었다는 것에서는 그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하지만 만일 그의 형 소현세자가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우수한 문물과 넓은 식견을 바탕으로 세계를 향한 조선 경영을 꿈꾸었다면이라는 생각이 드는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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