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현대

3.1운동의 영웅 유관순 열사

윤여시 2015. 2. 28.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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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영웅 유관순 열사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수많은 열사들 중에서도 꽃다운 18살에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다 죽은 소녀가 있다... 그리고 그녀는 우리 대한민국이 세워진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3.1절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유관순 열사에 대해 알아보자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관순 열사의 옥중에서 찍은 사진..

눈이 많이 부어있다..

 


|유관순 탄생과 성장


유관순은 1902년 현재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류중권의 3남 1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유관순의 아버지는 일찍부터 기독교에 입교하여 신실한 기독교인임과 동시에 자신의 재산을 모두 털어 학교를 세워 우리 민족의 계몽운동에 앞장선 계몽운동가였다. 


이 같은 집안의 배경을 바탕으로 유관순 역시 일찍부터 기독교 감리교에 신자로서 신앙심을 키워갔고 이미 1910년 빼앗겨 버린 나라에 대한 아픔을 간직하며 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애국정신을 키워 갔다. 그러던 1916년인 그녀 나이 14살때 당시 충청남도 감리교회 공주교구에 있던 미국 선교사 사애리시 부인을 통해 서울에 있는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했으며 1919년 고등과로 진학했다. 


그리고 그 해 고종황제가 일본에 독살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한 유관순은 마침 민족지도자들이 대규모로 준비하던 3.1운동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고 이에 참가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3.1운동이 시작되었던 종로의 탑골공원 


|3.1운동에 참여하다


마침내 우리나라의 대표 민족지도자들과 수많은 학생들은 1919년 3월 1일 오후2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고 그곳에 모여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물밀듯이 서울을 뒤덮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만세를 외치며 서울 시내 이곳저곳을 들끓게 만들었고 3.1운동에 참여하기로 굳게 다짐했던 유관순과 다른 이화학당 학생들 만류하는 이화학당 교장을 뒤로 하고 이 만세 물결에 참여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일본은 3월 10일 서울시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모두 휴교령을 내렸고 유관순은 이 만세운동을 자신의 고향에 전하고자 기차에 몸을 싣고 천안으로 향한다. 그녀의 고향은 서울과는 다르게 3.1운동을 아는듯 모르는듯 잠잠해있던 상태였는데 유관순은 마을을 돌며 어른들을 설득하고 자신이 다니던 매봉교회에서 사람들에게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에 대해 역설한다.


천안 아우내 장날을 만세운동의 날로 잡고 여러 연락책들을 통해 안성, 진천, 청주, 목천, 연기 등 전역에 연락책을 두어 계획을 하나하나 추진해나갔으며 태극기를 직접 만들며 거사일을 기다렸다. 그리고 3월 31일 유관순은 매봉에서 봉화를 올리며 만세운동에 대한 점검을 마쳤고 마침내 4월 1일이 다가 왔다.





천안만세운동이 열렸던 아우내장터

 


|고향에서의 만세 운동


4월 1일은 음력으로 3월1일임과 동시에 아우내 장터의 장날이었는데 유관순은 직접 장터에서 손수 만든 태극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만세 운동에 참여할 것을 외쳤다. "우리 2천만 동포는 한 겨레입니다. 우리 나라는 4천년의 역사를 지녀온 자랑스러운 민족입니다. 그런데 왜놈들이 우리 나라를 강제로 빼앗아, 10년 동안이나 우리를 못살게 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우리가 찾아야 합니다 나라를 되찾아 독립해야 합니다!"라고 외쳤고 이내 태극기를 꺼내들어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조용했던 아우내장터는 사람들의 만세소리와 함께 천안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갑작스러운 만세소리에 당황한 일본 헌병들은 곧바로 총검을 휘두르며 무자비하게 시위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이어 달려온 수비병들은 무자비하게 시위대를 향하여 총을 쏴 19명의 사망자와 3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만세 운동을 전개하다 일본군의 총탄에 죽는 사람들을 보고 분개한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과 그 어머니 역시 이를 막다가 안타깝게 목숨을 잃고 만다.


자신의 앞에서 부모님이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유관순은 만세운동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곧 삼촌 유중무와 함께 일본 헌병대에 잡히고 만다.





유관순 열사가 옥고를 치러야 했던 서대문 형무소

 


|열여덟 별이 지다..


헌병대에 잡혀온 유관순은 끌려오자마자 심하게 매를 맞으며 천안경찰서에 잡혔다가 공주경찰서 감옥으로 옮겨졌고 공주지방법원에서 1919년 5월9일 재판을 받아 5년형을 선고 받는다. 하지만 이에 분개한 유관순은 항소했으나 6월 30일 3년형을 선고 받았다.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을 때도 유관순은 "나는 조선사람이다 조선 사람이 왜 왜놈들에게 재판을 받아야 하느냐! 너희들은 나를 재판할 권리가 없다." 고 말하며 일본의 강제 침략에 대한 비난을 서슴치 않았으며 만세 운동의 정당성에 대해 당당하게 말했다.


유관순은 많은 톡립투사들이 있는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게 되었는데 유관순은 옥중에서도 틈만 나면 만세를 불렀으며 이로 인해 모진 고문과 구타를 받아도 만세를 멈추지 않았다. 특히 1920년 3월1일 3.1운동의 1년을 기념해서 옥중 만세 운동을 벌이기도 해서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고문을 받았으며 1920년 9월 28일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녀의 나이 열여덟살이었다.  



일각에서는 유관순 열사에 대한 공로가 작다고 말한다... 그러나 열여덞 소녀의 몸으로 우리 민족의 식지 않는 열정과 정신을 보여준 그녀야 말로 그 어떤 역사적 공로보다도 아름답고 빛나며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을 수 있는 숭고한 희생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96주년 3.1절을 기념하며 유관순 열사를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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