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정조의 대를 잇다! 순조의 어머니 수빈 박씨 그녀는 누구인가?

윤여시 2021. 9. 19.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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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대를 잇다! 순조의 어머니 수빈 박씨 그녀는 누구인가?

정조의 후사는 왕위 내내 큰 골칫거리였다. 중전은 왕자를 낳지 못하였고, 사랑했던 의빈성씨에게 겨우 얻은 아들 문효세자마저 어린나이에 죽고만다. 그런 정조에게 아들을 선사한 인물이 바로 수빈 박씨이다. 순조의 어머니 수빈박씨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수빈박씨 가계도

|수빈박씨의 집안

 

반남 박씨 박준원과 원주 원씨의 3녀로 여주에서 출생했다. 정조시대 유명한 실학자 연암 박지원과 아버지는 똑같은 항렬의 친척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어머니 원주 원씨 역시 효종의 여섯째 딸 숙경공주의 손자 원경유의 딸이자 윤두수 7세손 윤형동의 외손녀이니 나름의 가문이 있었지만 아버지 박준원 역시 수빈 박씨가 궁에 입궐하기 몇달전에 벼슬길에 올랐다고 하니 실제 집안은 그리 여유롭지 못했다고 한다.

 

|수빈박씨 궁에 입궁하다 - 후궁간택

 

정조와 의빈성씨의 장남이었던 문효세자가 홍역으로 죽고, 중전 효의왕후, 화빈윤씨 역시 상상임신만 있고 후사를 도저히 이을 수 있는 방법이 없자 정순왕후 김씨가 후궁간택령을 내려 후궁을 선발하게 된다. 

 

이때 사실 수빈박씨는 혼기가 차있었던지라 중매쟁이의 소개로 근처 양반집 자제와 혼인을 하려 했으나 혼례를 앞두고 둑이 터져 마을에 홍수가 나고 만다. 온 마을이 물에 잠겼고 수빈 박씨 집 역시 무너졌으니 혼사도 못치루게 되었고, 이때 박준원의 사촌인 박명원이 소식을 듣고 후궁간택에 딸을 내보내는게 어떻냐고 말한 것으로 인해 수빈박씨는 후궁 간택에 이름을 내게 되었다. 

 

1787년 삼간택을 통해 정조의 후궁으로 간택되게 되는데 사실 재간택까지는 2등이었다가 삼간택에서 뽑혔다고 전해진다. 이때 가순궁이라는 칭호를 얻었고 수빈보다 가순궁으로 더 많이 불렸다고 한다.

|수빈박씨 후궁 시절

 

수빈박씨가 처음 후궁으로 들어 올때 그녀의 처소는 창경궁 집복헌이었다. 이곳은 숙종의 후궁인 명빈박씨가 연령군을 낳았고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를 낳은 곳이었다. 수빈 박씨의 처소가 창경궁 집복헌인 것도, 당시 정조의 나이가 불혹에 다다를때여서 후사에 대한 절실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후궁으로 들어온지 3년만인 1790년 정조가 39세때 드디어 왕자를 낳는다. 그가 바로 조선 23대왕 순조이다. 이후 3년 후에는 딸인 숙선옹주까지 낳으며 왕실에 기쁨을 더해주었다. 유일한 정조의 후사인 순조를 낳은 후에 거만해질법도 하지만 순조는 왕비인 효의왕후를 섬기고 후궁들을 보살피니 그녀의 인품에 궁이 칭송했다 전해진다. 

또한 정조는 수빈의 큰아버지이자 아버지 박준원의 형인 당대 명망 있는 유학자 박윤원과 서찰로 교류하였고 박준원의 장남이자 수빈박씨의 큰 오빠인 박종보를 신임하여 격식 없이 대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처럼 자신의 처가와 남편인 정조의 사이까지 좋았던지라 수빈박씨의 복은 정조의 다른 후궁이나 왕비인 효의왕후 보다 더 컸다 할 수 있겠다.

 

|순조 재위 시절

 

1800년 정조가 갑자기 죽자 순조가 10살의 어린나이로 나이로 왕위에 오르고 당시 대왕대비인 정순왕후가 섭정을 한다. 자신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음에도 수빈박씨는 대왕대비 정순왕후, 시어머니 혜경궁 홍씨, 왕대비 효의왕후에게 3차례 문안하는 것을 쉬지 않았다고 한다. 이름하여 꼬인 군번인데... 전혀 그렇게 생각치 않고 예를 다했다 전해진다. 아랫사람들에게 인자하면서도 궁궐의 법도를 다스렸고 말수가 적었으며 검소했다고 전해진다. 

정순왕후는 이러한 수빈박씨를 좋아하여 아버지 박준원을 어영대장을 거쳐 판의금부사로, 수빈 오빠인 박종보와 박종경을 각각 종척의 집사로 삼았으며 이후 벼슬이 날로 높아져 박준원은 공조판서 박종보는 승지에 임명되기도 한다. 또한 숙빈박씨의 딸인 숙선옹주를 후궁의 딸이 아니라며 공주와 옹주 사이의 특별한 명칭을 주자고도 하는 등 편의를 봐줬다. 

 

 

순조 집권 당시 반남 박씨는 박종경을 중심으로 세를 이루며 안동김씨와 더불어 세도정치를 이루려 하였으며, 순조 역시 자신의 외가인 안동김씨의 세력이 강해지자 외숙부인 박종경의 벼슬을 높이고 견제하려 하였다. 그러나 박종경과 수빈박씨가 죽은 후 그 세력이 약해져 뒤로 물러나게 된다.

 

혜경궁홍씨 역시 자신이 쓴 한중록을 수빈박씨에게 맡기는 등 그녀를 신뢰했다고 전해지는데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할 당시 혜경궁의 동생 홍낙임이 귀양갈 위기에 처하자 아버지 박준원에게 정순왕후를 설득시키는 한편 자신 역시 석고대죄를 하며 홍낙임의 귀양을 막는 등 왕실의 평안을 위해 노력한다.

 

수빈박씨의 묘 남양주 휘경원

|수빈박씨의 죽음

 

순조 22년인 1822년 수빈박씨는 창덕궁에서 세상을 떠난다. 대한제국 때 정조과 황제가 되면서 1901년 현목수비가 된다. 순조는 수빈박씨가 죽고 왕비의 예로 장례를 치르렀으며 3년동안 흰옷을 입었다 하니 그 어머니에 대한 효심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묘는 휘경원이라 불리며 첫 매장지인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이 여기서 따온 이름이다. 양주에 위치하였다가 철종때 남양주시 진접읍으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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