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족을 정벌한 고구려 초기 명장 부분노 그는 누구인가?
드라마 <주몽>에서 나오듯 주몽은 그 자신의 뛰어남도 있지만 그를 따르는 부하들의 능력이 상당히 출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중 부분노는 삼국사기에서 고구려의 영토를 확장하고 선비족을 격퇴하여 고구려의 기틀을 다지는데 큰 힘을 보탠 명장으로 나온다. 부분노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부분노 역사에 등장하다 - 동명성왕(주몽)
부분노가 태어난 곳과 출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려초기 삼국의 역사를 기록했던 구삼국사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는 부분노가 기록되어 있다. 그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주몽)때부터 그 아들 유리왕때까지 활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분노가 처음 고구려에서 공을 세운 대목은 이러하다. 고구려를 세운 동명성왕(주몽)이 1년후, 비류국(압록강 지류인 동가강 유역에 위치한 작은나라)을 치게 된다.
이때 비류국을 다스리던 송양과 주몽이 활쏘기를 하였고 주몽이 압도적으로 이겼는데 송양이 역사가 짧은 고구려를 업신 여기자 동명성왕이 고구려가 건국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고각(의식을 사용할 때 쓰는 옛날 북), 위의(위엄과 예법)이 없어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부분노는 비류국에 몰래 잠입하여 고각을 가져오겠다고 말한 후, 고각을 훔쳐 고구려로 돌아온다. 이에 송양이 항의하지만 동명성왕이 고각에 색칠을 다시하여 증거를 없애니 송양이 할말이 없었고 곧이어 나라를 들어바친다. 비류국 정벌은 첩보와 지략이 능한 장수였던 부분노가 역사에 첫 이름을 올린 순간이자 고구려의 명장이 된 계기가 되었다.
부분노는 동명성왕이 처음 개국을 했을때부터 그 공을 세운 인물이나 이름에서 노(종 노,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신분이 그리 높지 않은 상태였으며 고구려의 개국공신이자 동명성왕의 최측근인 오이, 마리, 협보와는 다른 대접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부분노는 오이와 함께 행인국(태백산 동남쪽에 위치한 나라 태백산은 백두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이를 통해 볼 때 행인국은 개마고원 일대에 위치해 있던 나라로 보임)을 정벌하는데도 공을 세운다.
|부분노 선비족을 정벌하다 - 유리왕
부분노가 역사에 완벽히 이름을 남기고 고구려의 기틀을 마련한 장수라고 표현되는 것은 바로 기원전 9년(유리명왕 11년)에 벌어진 선비족 공략이었다. 선비족은 몽골 또는 튀르트계의 민족으로 유목과 목축을 주로 하는 민족이었는데 당시 고구려를 곧 잘 침입해 노략질을 일삼고 빠른 기동력을 앞세워 자신의 땅으로 도망가는 행태를 벌이고 있었다.
이에 유리왕이 고민에 빠졌고, 누구든 선비족을 정벌하면 큰 상을 내리겠다고 한다. 이때 부분노가 나서 선비족은 꾀로써 무너트려야 한다며 계책을 유리명왕에게 고한다.
|선비족 정벌을 위한 부분노의 계책
부분노의 계책은 다음과 같다.
"거짓으로 간첩을 만들어 선비족에게 보내 거짓말을 하게 해야 합니다. '고구려는 작고, 군대가 약해 겁이나 움직이지 못한다'라고 말하면 선비족은 방심하고 수비를 제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때 제가 몰래 군사를 이끌고 가 숲속에 숨어서 선비족의 성을 빼앗을 준비를 하겠습니다.
이때 왕께서 군사를 이끌고 선비족의 성 남쪽에 진을 치다가 도망치는 척 하면 선비족은 이에 속아 기쁘게 쫒을 것입니다. 이때 제가 군사를 이끌고 성을 접수한 후 왕께서도 뒤를 돌아 양쪽에서 선비족을 공격하면 선비족은 무너질 것ㅇ비니다. "
즉 거짓으로 선비족을 속인 후 여기에 유인책은 물론 매복까지 모든 전략의 총집합이었던 것이다. 이 계책만 봐도 얼마나 부분노가 치밀하고 지략이 있는 장수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선비족 정벌에 쓴 계책은 이후 서기 5세기나 되어야 나오는 병법서 삼십육계의 주요한 전략들을 한데 모은 것으로써 부분노의 전략은 대단한 것이었다.
한편, 유리명왕은 부분노의 이 계책을 받아들여 선비족 공격에 나서게 된다.
|선비족 정벌의 결과
선비족은 이미 부분노가 보낸 간첩의 반간계에 속아 방심을 하고 있었다. 이에 유리왕이 선비족의 성을 공격하는 척하면서 퇴각을 하였고 선비족은 자신의 성문을 열고 유리왕을 쫒기 시작한다.
이에 부분노가 텅 빈 선비족의 성을 빼앗았는데, 성이 떨어진 것을 본 선비족이 황급히 자신의 성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자 유리왕이 선비족의 뒤를 쳐 박살을 낸다. 이에 선비족은 항복을 하고 고구려에게 병합된다.
이 같은 공을 세운 부분노에게 유리왕은 기뻐 부분노가 정벌한 땅을 식읍으로 주려 하였는데 부분노는 이를 사양하였고 유리왕의 덕이라고 치켜세운다. 유리왕은 이에 황금 30근을 비롯해 좋은 말 열필을 부분노에게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지배층의 경제기반을 볼 수 있는 것이라 의미가 있는 기록이라 할 수 있으며, 부분노의 성품까지 알 수 있는 기록이다.
부분노는 태어난것과 마찬가지로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이 같은 부분노의 큰 활약은 기록이 되어 있으며 당시 초기 고구려의 정복사업에 더 없이 필요한 큰 공이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멋진 계책을 세운 부분노 그는 분명 고구려의 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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