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삼국시대

우리나라 최고의 국무총리이자 명재상 고구려 을파소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23. 12. 23.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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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고의 국무총리이자 명재상 고구려 을파소 그는 누구인가?

우리나라의 역사속에서 명재상들의 이름이 많지만 그 옛날 삼국시대 고구려의 을파소만큼 드라마틱하게 정치에 입문하여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린 인물은 없을 것이다. 최고의 행정가이자 고구려의 체계를 만들어 낸 인물 을파소, 그의 활약에 아직까지도 을파소를 언급하는 정치인들이 많은데, 도대체 을파소 그는 누구인가?

1. 을파소가 고구려 역사속에 등장한 배경

고국천왕
고구려 9대왕 고국천왕

 

- 고국천왕, 반란을 진압하고 인재를 찾다

을파소의 등장을 알아보기 전에 고구려 제 9대왕 고국천왕이 왜 인재를 찾았는지에 대한 배경을 알아야 한다. 

서기 179년 고구려에서는 8대왕 신대왕의 뒤를 이어 그 아들들 중 둘 째 아들이었던 남무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고구려 9대왕 고국천왕이다. 당시 고국천왕은 연나부 우소의 딸 우씨를 왕후로 삼았는데 우씨왕후의 외척인 어비류와 좌가려가 국정을 농단하고 그 권력을 마음대로 쓰기 시작한다. 

특히 백성들을 하인 삼고 소작농을 만들어버리는 등 백성에게 직접적으로 해악을 끼친다. 이를 알아챈 고국천왕이 자신의 막내 동생인 계수를 통해 민심을 알아보니 우씨의 외척인 어비류와 좌가려에 대한 원망이 자자했다. 이에 고국천왕은 분노하여 좌가려 일당을 붙잡아 재산을 모조리 환수하고 백성에게 돌려줄 것을 명하였다. 

그런데 이때, 이를 몰래 듣고 있던 좌가려 세력의 시녀가 이를 고변하니 좌가려와 어비류는 처벌이 두려워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다행히 고국천왕은 이를 대비하였고 좌가려와 어비류는 물론 그 일당은 모조리 잡아 죽이고 귀양 보냈다. 그리고 이에 충격 받은 고국천왕은 이 모든 것이 덕이 없는 자가 나라의 중책을 맡아서라며 어질고 성품이 착한 인재를 찾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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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파소

- 을파소 안류의 추천을 받아 고구려 역사에 등장하다 

고국천왕이 인재를 찾는다는 소식에 고구려의 5부족중 하나였던 관나부 자아홍이란 신하가 자신의 관나부에 '안류'라는 인물을 추천한다. 

 

당시 신하들 역시 안류라는 인물의 현명함을 들어왔던터라 고국천왕은 자신의 동생 계수를 예물을 가득 실은 수레와 함께 안류에게 보낸다. 안류가 사는 초가집에 찾아온 계수는 공손하게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안류에게 말하자 안류는 계수를 따라 고국천왕을 만나게 된다. 

고국천왕은 안류를 기뻐 맞이하며 국정을 도와달라고 청하니 안류는 자신은 그릇이 부족하며 대신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인재를 추천해주겠다고 한다. 이에 고국천왕이 누구인지 묻자 안류는 고구려 2대왕 유리왕의 최측근 신하였던 을소의 후손으로 시골에 머물며 살고 있는 을파소를 추천한다.

 

이에 고국천왕은 다시 급히 을파소를 찾아 궁으로 데려오게 한다. 을파소가 궁에 오자 고국천왕은 중외대부로 임명하고 우태의 직위를 주면서 조정의 일을 도와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을파소는 자신의 개혁 정책을 펼치기에는 그 벼슬의 작위가 약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른 현명한 사람을 찾아 조정일을 보게 하소서'

 

그도 그럴 것이 조정에 아무 지지기반도 없는 을파소가 전권이 주어지지 않으면 당시 권력을 잡고 있는 5부 세력과는 싸워 이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알아챈 고국천왕은 당시 신하들의 최고 자리이자 지금의 국무총리격인 국상 자리를 주게된다. 그야말로 당시로서도 지금으로서도 파격적인 자리였다. 그러자 많은 신하들이 말도 안되는 처사라며 항의를 했지만 고국천왕은 이같은 반응에 오히려 '국상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면 삼족을 멸하겠다'라고 엄포를 놓으니 을파소는 순식간에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때 을파소의 나이 50세가 넘은 시점이었다.

 

여기에 안류에게까지 대사자 자리를 주게 되니 고구려 조정은 최고의 신하들이 자리잡게 된다. 

2. 을파소 선정을 베풀다

진대법

 

을파소가 국상 자리에 오르자 먼저 고구려의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당시 고구려는 계루부, 소노부, 연노부, 절노부, 순노부가 함께하는 5부족 연맹체제였지만 이를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로 나누는 형태로 바꾸고 각 부족장들은 중앙의 귀족으로 만들어 부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고구려 조정의 권력을 강화한다.

- 을파소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보장제도 '진대법'을 시행하다 

을파소가 국상에 올라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기 시작한지 3년째 되는 해인 194년 7월, 한 여름에 서리가 내리며 곡식들이 피해를 입자 백성들이 굶기 시작한다. 이에 고국천왕은 고민에 빠졌고 을파소는 봄~가을 기간 나라에서 저장해 놓은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 추수에 갚도록 하는 진대법을 실시한다. 

 

진대법은 우리나라의 최초 사회복지제도라 봐도 무방한 그 시대 백성의 상황을 생각했다는데서 의미가 있다. 또한 이를 통해 당시 부족한 식량으로 고리대에 시달려야만 했고 이를 갚지 못해 노비가 되어야만 했던 수많은 고구려 백성들을 구제해냈다. 

 

물론 진대법이 만들어지고 시행될 때 을파소가 직접적으로 추진한지에 대한 기록은 있지 않으나 당시 국상의 자리에서 고구려를 이끌던 을파소의 결단이나 지혜 없이 만들어진 법이라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3. 을파소의 죽음과 평가 

을파소는 고국천왕이 죽고 그 뒤를 이은 산상왕 때에도 국상을 겸했다. 이후 을파소는 203년에 죽게 되니 모든 백성이 슬퍼하였다고 전해진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 을파소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을파소는 지성으로 나라에 봉사하여 정치와 교화를 밝히고 상벌을 신중하게 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고 중앙과 지방에 일이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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