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욕인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였던 고구려의 여인 우씨왕후 우희
우리나라에서 남편이 달라지는데 왕후를 두 번이나 한 여성이 있다. 언뜻 들으면 무슨 말인지 모를 수도 있지만 우씨왕후는 형이었던 고구려 9대왕 고국천왕의 아내로 고국천왕이 죽자 그 동생인 10대 왕 산상왕의 아내가 되어 무려 두 번이나 왕후를 지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우씨왕후는 고대 고구려의 문화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여인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고구려 우씨왕후 그녀는 과연 누구일까?
1. 우씨왕후의 가문과 고국천왕 시기
- 배경 스토리
초기 고구려는 관나부, 비류부, 연나부, 계루부, 환나부라는 5개의 연맹부족이 모여 나라를 운영하는 연맹체제였다. 그중에서도 왕족인 계루부와 왕비족인 연나부는 함께 하며 연합 정권을 이루고 있었다. 10대 왕 고국천왕의 왕후였던 우씨왕후 역시 연나부 출신이었다.
그런데 이 연나부는 왕후의 권세만 믿고 포악한 행패를 일삼고 권력을 농단하였는데 <삼국사기>에는 왕후의 외척이자 연나부의 일족들이 백성들의 자녀를 마음대로 납치하고 논과 밭을 빼았았다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였다. 이에 고국천왕은 분노하여 우씨왕후의 외척인 어비류, 좌가려 등을 처벌하고 연나부에 죄를 물으려 했다. 연나부는 이를 알고 반란을 일으켰지만 고국천왕은 이미 예상하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 연나부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한순간에 자신의 친정 가문이 박살이 난 우씨왕후는 위기 그자체였다. 여기에 고국천왕은 본격적으로 왕권강화를 위해 귀족이 아닌 지방의 인재들을 불러모으니 그 중에 한명이 바로 명재상으로 알려진 을파소였다.
고국천왕과 을파소는 백성을 위한 치세를 베풀며 귀족들의 힘을 지속적으로 약화 시키며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치세를 펼치던 고국천왕이 재위기간 17년만인 197년 세상을 떠나게 된다.
2. 우씨왕후 권력을 위해 계략을 꾸미다
- 고국천왕의 동생 연우를 왕위에 올리다
고국천왕과 우씨 왕후의 관계에는 뒤를 이을 왕자가 없었다. 이렇게 되면 고국천왕의 동생들 가운데서 왕위를 잇게 되는 상황이었다. 이때 우씨왕후는 본인이 왕위를 이을 동생을 정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
고국천왕이 죽은날 밤 우씨왕후는 이를 비밀에 부치고 고국천왕의 첫 째 동생인 '발기'를 먼저 찾아간다. 우씨왕후는 발기에게 '왕이 후계가 없으니 당신이 그다음 왕위에 올라야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발기는 이를 알아채지 못하고 밤 늦게 찾아와 뜬금 없는 말을 하는 자신의 형수인 우씨를 외면한다.
이에 우씨왕후는 다음 동생인 연우의 집에 찾아간다. 그런데 연우는 우씨왕후를 극진히 예를 갖춰 대접하였고 이에 우씨왕후가 고국천왕의 승하소식을 알리게 된다. 때마침 연우는 직접 칼로 고기를 대접 하려다가 칼에 손가락을 다치게 되는데 이때 우씨왕후는 자신의 치마끈을 풀러 연우의 다친 손가락을 감싸준다. 그리고 이때, 그들이 느꼈던 감정은 형수와 동생 이상의 감정이었다.
이후 왕후 우씨가 밤이 깊다며 자신을 궁에 데려다 달라고 말하자 연우는 그 뜻을 알아채고 손을 잡고 궁으로 들어갔으며 그 다음날 왕후 우씨는 고국천왕의 유언이라고 하면서 동생 연우를 왕위에 올린다. 이가 바로 고구려 10대왕 산상왕이다.
3. 산상왕 즉위 후 우씨왕후 권력을 휘두르다
- 산상왕 대에 우씨왕후 권력을 잡다
고국천왕 다음에 발기는 누가봐도 자신이 왕위에 올라야 했으나 뜬금 없이 왕이 죽었고, 그 동생 연우가 왕위에 오른다는 소식에 분노하여 반란을 일으키지만 세가 모자르자 요동으로 넘어가 공손씨의 군대를 빌려 고구려를 침공한다. 그러나 발기와 연우의 막내 동생이었던 고계수에 의해 패배하고 발기는 죄책감에 부끄러움을 안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제 산상왕은 온전히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자신을 왕위에 올려준 왕후 우씨를 아내로 맞아들이게 된다. 지금 들으면 전혀 이해가 안가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고대 사회에서는 형이 사망하면 동생이 그 형수를 부인으로 맞아들이는 일명 '형사취수제' 문화가 있었고 우씨왕후는 이로써 왕후를 2대나 유지하는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기록을 세우게 된다.
우씨왕후는 고국천왕 시절의 권력 이상으로 많은 권력을 갖게 된다. 여기에 질투도 심해서 자신말고는 왕에게 다른 부인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씨왕후는 산상왕의 후계를 낳지 못했고 산상왕은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고민에 빠진다. 이에 산상왕은 하늘에 기도를 하다가 둘째 왕후를 얻으면 왕자를 얻을 수 있다는 꿈을 꾸게 된다. 우씨왕후의 눈치만 보던 산상왕은 신나서 이를 신하들에게 전하게 되고 을파소는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의 뜻이라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을 한다.
- 산상왕 두 번째 왕후를 맞이하다
208년 나라를 위해 제사를 지내려고 준비한 돼지가 주통촌이라는 곳으로 달아났는데, 이때 어떤 아름다운 여인이 돼지를 잡게 된다. 이 소식을 듣고 산상왕이 주통촌으로 직접 내려가 여인을 하룻밤을 보내고 아들을 낳으면 절대 버리지 않겠다고 약조한다. 이후 이 여인이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우씨왕후가 이 여인을 죽이라며 병사를 보낸다. 그런데 이때 여인이 자신은 지금 왕의 자식을 잉태하고 있다는 소식을 병사들에게 말하고 목숨을 보존하게 된다.
이후 이 소식은 산상왕에게로 전해져 산상왕은 주통촌의 이 여인을 둘 째 왕후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둘 째 왕후는 곧 아들을 낳게 되니 이가 바로 고구려 11대왕 동천왕이었다. 그러나 우씨왕후는 자신의 권력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끝까지 이들을 괴롭히니 후계가 태어난지 4년이나 지나서야 왕세자에 책봉이 될 정도였다.
- 11대왕 동천왕과 우씨왕후
227년 산상왕 역시 세상을 떠났음에도 우씨왕후는 살아 있었다. 11대 왕 동천왕은 자신을 어렸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막강한 권력을 지니며 괴롭힌 우씨왕후를 오히려 극진히 모셨다. 왕후가 왕 전용 말의 갈기를 자르게 하고, 왕의 옷에 국을 엎질러도 동천왕은 모두 참으며 오히려 더욱 높임을 했다.
이는 동천왕의 품성이 좋았던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당시 우씨왕후의 권력이 막대했기 때문인데, 당시 우씨왕후는 자신의 친정인 연나부 출신 명림어수라는 인물을 지금의 국무총리격인 국상자리에 앉히는 등 권력이 막강했다.
- 우씨왕후의 죽음과 유언
우씨왕후는 동천왕 8년인 234년 세상을 떠나게 된다. 우씨의 48년의 왕후 생활과 7년의 왕태후 생활 도합 55년의 치열했던 권력의 순간이 막을 내린 것이다. 그녀가 태어난 시기가 언제인지는 모르나 대강 15살에 궁으로 들어왔다 가정해도 70살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여튼 우씨 왕후는 눈을 감으면서 유언을 하는데, 자신이 도저히 고국천왕을 볼 면목이 없었는지 산상왕의 곁에 묻어달라고 말을 한다. 보통 취수제의 경우 원래의 남편 옆에 묻히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우씨 왕후는 이마저도 무시한 것이다. 여튼 이러한 상황에 당시 무당이 이를 보고는 고국천왕이 자신의 아내가 동생에게 묻히는 것을 보고 극노하였다고 전하며 자신이 세상 사람들을 보기 부끄러우니 무덤을 가리게 하였고, 후세에 소나무를 겹겹이 심어 무덤을 가리게 하였다고 전한다.
조선의 역사서 <동국통감>에서눈 우씨 왕후의 기록을 전하며 '천하 고금에 더러운 행동과 도덕을 지키지 않은 자는 이 사람뿐이라며' 최악의 평을 내린다. 그러나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한 여성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되기도 한다.
고구려 역사에 이름을 남긴 거의 유일한 여성일 정도로 우씨 왕후는 파란만장하고 스토리 있는 삶을 살았으며 그녀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드라마 <우씨왕후>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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