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의 천재 신라삼최 중 한 명, 고려 최언위 그는 누구인가?
고려의 역사를 가장 화제성 있게 이끌어낸 드라마 하면 누구나 모두 대하사극 <태조왕건>을 꼽을 것이다. 그리고 이 태조왕건에 등장하는 여러 등장인물 중 지략을 담당하는 인물로 후백제 최승우가 등장하는데 이때 소개 되는 말이 바로 신라삼최이다. 즉 신라를 대표하는 최씨 성을 가진 3명이라는 뜻인데, 드라마를 본사람이라면 아마 대부분이 신라 최치원, 후백제 최승우, 고려는 최응이라고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에 있었던 삼최 중 한명은 바로 최언위라는 인물이다. 최언위 그는 누구일까?
1. 신라삼최 최언위 출생과 집안
최언위는 868년 경주에서 태어났으며, 또다른 신라삼최 중 한 명인 최치원의 사촌동생이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탁월한 능력이 있었고 성품이 온화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언위는 6두품의 신분을 타고났는데, 이들은 당신 통일신라의 지식인 계층이긴 했지만 신분의 한계가 있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신라 조정에 들어가 고위직까지는 올라 갈 수 없었다. 오직 신라 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은 성골과 진골만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골품제도 때문이었다.
따라서 당시 6두품 신분을 가진 우수한 인재들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고 더 뛰어난 인물들은 당시 당나라 조정의 시험을 통과하여 관직생활을 하곤 하였다. 때문에 최언위 역시 18세의 나이인 885년에 당나라로 유학을 가게 된다.
2. 최언위의 당나라 장원급제
이후 최언위가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906년 당나라 빈공과에 장원급제 했다는 기록을 통해서다. 참고로 빈공과란 당시 당나라에서 신라뿐 아니라 여러 외국인들에게 진행하던 과거시험의 일종인데, 여기서 최언위가 당당히 장원급제를 한 것이다. 덧붙여 최언위가 장원급제를 할 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당나라의 빈공과는 당시 최치원, 최승우뿐 아니라 수많은 신라의 인재들이 싹쓸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발해 출신 오소도라는 자가 단 한번 신라의 인재들을 제치고 1등을 한적이 있다. 이후 오소도의 아들 오광찬도 빈공과에 당당히 응시했는데 같은해 시험을 치룬 최언위가 1등을 해버린 것이다.
이에 마침 당나라에 있던 그 아버지 오소도가 자신의 아들 오광찬의 등수를 높여달라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3. 최언위 통일신라로 돌아오다
그가 장원급제를 하고 얼마 뒤, 흔들리고 있던 당나라는 멸망하였고 2년후인 909년 42세에 당나라 25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다시 신라로 돌아온다. 다만 당시는 후삼국시대로 고려, 후백제가 통인신라를 먹잇감으로 삼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신라 조정 역시 녹록치 않은 상황이었다.
여튼 돌아온 최언위는 집사시랑 벼슬을 하게 되는데, 그가 있던 집사성에서 지금의 차관 정도의 직위로 집사성은 왕정의 기밀사무를 담당하는 당시로도 상당히 중요한 부처였다. 이후 서서원학사 직위 등을 맡으며 6두품이 올라 갈 수 있는 단계까지는 모두 올라간다. 이후 경순왕의 아들과 자신의 딸을 혼인시키기도 하는 등 최언위는 당시 망해가는 신라 조정에서 거의 정점까지 자리를 잡은 인물 중 하나였다.
4. 최언위 고려로 향하다
이후 언제부터인가 최언위는 고려로 귀부하여 왕건의 신하가 되는데, 역사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가 언제 고려로 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사극 태조왕건에서 나온 명장면중 하나였던 국서의 교환 장면에서 고려측 국서를 작성한자가 최언위라는 말이 있다.
이를 자세하게 살펴 보면 928년, 공산전투에서 견훤이 왕건에게 압승을 한 후 최승우를 통해 글을 짓게 하여 왕건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듯한 국서를 보낸다.
그 문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데 '후백제와 고려는 화친의 세월이 있었으나 이제 서로 국경을 침범하여 싸웠으니 이제 서로 친화하여 평화를 누리도록 하라라고 하였으며 조개와 황새가 서로 싸워 물어버리면 어부가 이익을 보는 것처럼 서로 싸우지말고 후회할 짓을 하지 말라' 라는 뜻이었다. 즉 자신들이 전쟁을 하면 하고 화친하자면 화친하자고 말하는 상당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이를 받아든 왕건 역시 화를 참고 견훤에게 답변을 보내도록 하는데 이때 국서를 쓴 인물이 정확하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문장의 특성이나 중국 역사를 예시로 든 것이 결국 고려로 귀부한 최언위가 쓰지 않았겠냐는 추론이 대세이다. 한편 신라삼최 최승우의 글에 반박하여 최원위는 다음과 같이 글을 썼다.
"나는 전란을 그치게 하고 나라의 재앙을 구하려 했으며 이웃나라와 잘 사귀어 화친을 맺어 백성을 살기 좋게 하려 했지만 견훤은 신라로 쳐들어가 임금을 죽이고 그 궁궐을 부태웠으며 사람을을 죽이고 진귀한 보물을 약탈해간 맹수와 같다."
거만한 후백제의 태도에 반박하며 견훤이 신라에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무도한 짓을 한 것에 대한 강한 비판을 담아낸 것이다. 따라서 최언위는 최소한 국서를 보내기전 928년에는 이미 고려로 귀부한 것으로 보는게 맞다. (사극 태조왕건에서는 해당 일화를 최응과 최승우로 나왔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절대 그렇지 않다)
5. 최언위 고려에서의 활약
최언위는 이후 고려 태자의 스승이 되는 역할을 받았으며 그 벼슬이 문하시중(총리격) 다음인 평장사까지 역임하게 되는데 이보다 더 대단한 것은 고려 왕건 시대의 거의 모든 비문을 최언위가 담당하여 지었으며 고려의 호족들도 최언위를 따르며 존경하였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최원위는 당시 고려 사회의 오피니언리더로서 학풍을 만들어내고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인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여튼 그는 944년 혜종 2년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참고로 그의 아들 4명 역시 역사에 이름을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아들인 최광윤은 후진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거란에 붙잡혔지만 아버지를 닮아 뛰어난 재능으로 거란의 관직을 받아 중용되었고 후에 거란이 고려 침공을 계획할 때 이를 미리 알려주기도 하였다.
둘째 아들인 최행귀는 남쪽인 오월로 떠나 벼슬을 지내다 고려에 귀국해 관직생활을 했지만 광종대에 죽임을 당한다.
셋째 아들인 최광원은 그의 아들 최항(최원위의 손자)이 고려 현종대에 공신반열에까지 올랐다.
신라 삼최 최언위 그는 자신의 재능을 통해 끊임없이 도전한 인물로, 당시 동북아 나라들이 망하고 흥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발자취를 역사에 남긴 인물이다. 당나라, 신라 그리고 고려에 이르며 능력을 인정 받았던 최언위를 꼭 기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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