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수나라를 무너트리다! 진주 강씨 시조 강이식 장군!
고구려는 당시 초강국이었던 중국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고 그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던 우리 민족의 자부심이었다. 이 기간 우리의 역사속에는 양만춘, 을지문덕, 연개소문 등 명장들이 떠오르겠지만 또 한명의 명장이 있따. 바로 진주 강씨 시조 강이식 장군이다.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1. 강이식 장군은 중국에서 건너온 인물?
강이식 장군은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어마어마한 승리를 거둔 인물이지만 아쉽게도 언제 태어나고 죽었는지 기록으로 남아있지는 않다. 때문에 강이식 장군의 출생과 성장 그리고 전 생애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불분명하다. 다만 그럼에도 강이식 장군의 인생을 추론하는 기록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1.1 강이식 장군은 중국 출생? - 진주 강씨 족보
우리나라 강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진주 강씨의 족보를 보면 강이식 장군의 조상은 일찍부터 중국의 역사속에 등장했고, 강이식 장군 역시 수나라에서(지금의 중국 광동) 태어나 장원급제를 하고 관직 생활을 한다.
그러나 양제가 자신의 아버지 문제와 형을 죽이고 황제가 되어 무리한 고구려 1차 원정을 감행했고 강이식 역시 병마도사로 이 무리한 원정에 참가했다가 수 양제의 포악함과 판단력에 반발하여 고구려에 귀화한다.
하지만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 기록에서는 이미 강이식 장군이 수문제(수양제의 아버지)가 쳐들어왔던 때에 활약상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강이식 장군이 족보대로 중국 사람이었는지 또 고구려에서 언제 활약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2. 수나라 1차 침략에서 강이식 장군의 활약 - 임유관대
강이식 장군의 출생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는 뒤로 두고, 직접적으로 강이식 장군이 역사에 기록으로 등장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수나라 문제가 오랫동안 지속되어오던 중국의 남북조시대를 통일하고 이제는 외부로 눈을 돌려 고구려를 침략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고구려 역시 이미 수나라의 침략욕을 알고 있었고 이를 대비해 방어 준비를 꾸준히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597년 수나라 문제는 고구려에게 국서를 보내 고구려의 기를 죽이려 했는데, 강이식 장군이 이를 보고 "오만한 국서는 붓으로 답하는 것이 아닌 칼로 답해야 한다"며 수나라와 싸울 의지를 드러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가 서기597년으로 수문제의 협박에도 고구려 조정이 오히려 싸우길 원하자 수문제는 30만 대군을 일으켜 고구려를 침략하는 제 1차 고구려-수나라 전쟁을 일으킨다.
이때 칼로보여주겠다는 강이식 역시 고구려 최고 사령관 병마원수 자격으로 5만을 이끌고 출전한다.
2.1 임유관 전투의 대승
598년, 강이식은 대군을 이끌고 요서 지방에서 수나라 위충과 싸우다가 임유관으로 거짓 퇴각한다. 이를 보고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수문제는 30만의 육군을 구성하여 양랑에게 맡겨 임유관으로 보내고 주나후에게는 수군을 맡겨 진격토록 한다.
그런데 이때 주나후의 수군은 평양성으로 바로 진격할 것이라며 알리고 뒤로는 양랑의 30만 대군에게 군량미를 배로 나르기 위한 작전을 세우는데, 이를 알아챈 강이식이 배를 이끌고 요서 바다로 나아가 주나후의 보급선을 격파한다. 이후 임유관에 틀어박혀 싸우질 않으니 수나라 대군은 점차 보급이 끊기고 먹을 것이 없었으며 장마철을 만나며 비마저 쏟아져 각종 전염병이 돌기 시작한다.
수나라군대의 사기가 땅에 떨어질무렵 강이식은 마침내 문을 열고 출전하여 수나라 대군을 섬멸하니 이것이 바로 수나라를 상대로한 고구려의 1차 승리였다.
3. 강이식 장군에 대한 기록의 의문
앞서 말한 것처럼 강이식 장군에 대한 전투의 승리는 엄청난데 반해 기록이 많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강이식 장군에 대한 기록은 2개인데 하나는 진주강씨 족보의 기록, 다른 하나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이다.
먼저 두개의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상고사에서는 이미 양제의 아버지 수나라 문제가 쳐들어올 당시에 강이식 장군이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진주강씨 족보에서는 수나라 양제의 고구려 침공 당시 귀화했다는 점에서 시기 차이가 명확히 있다.
또한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는 <서곽잡록>, <대동운해> 등의 책의 기록을 인용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볼 수는 없다. 심지어 이 두 책도 존재하지 않아, 어떤 내용을 인용한 것인도 불분명하다. 조선상고사 기록에 따르면 그나마 강이식 장군의 묘가 옛 요동인 랴오닝성 지역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현재는 무덤이 훼손되어 비석조각을 세운 거북좌대만 남아 있어 알 수는 없는 상황이다.
아쉬운 것은 조선상고사 이전의 그러니까 삼국사기나 중국의 정사에 가까운 역사서에 강이식 장군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기록의 오류에 있어 신뢰성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진주 강씨 족보의 기록을 믿자니 당시의 기록도 아닐뿐더러 본래 족보의 기록은 선조에 대한 공을 좀 더 크게 바꾸는 점 등이 작용하기 때문에 신뢰가 부족하다.
3.1 고구려 강이식 장군의 후손이 왜 한반도 남해의 진주를 본관으로?
고구려 사람 강이식이 시조인데 왜 한번도 그가 가보지 않은 우리나라 남쪽의 진주가 본관이 되었는지는 다음과 같다. 통일신라 헌강왕 때 강이식의 자손 강진이 태중대부를 역임하고 진주부로 벼슬을 받으면서 이때부터 진주가 진주 강씨의 본관이 되었다. 본래는 진주라는 지명 대신 진향 강씨로 불렸으나 진주시에 통합되면서 지금의 진주 강씨가 된 것이다.
4. 진주강씨의 시조
기록이 불분명하지만 우리나라의 대표 성씨중 하나인 진주 강씨의 문중은 시조를 강이식 장군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랴오닝성의 강이식 장군 묘라고 추측되는 곳에는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진주 강씨 문중은 진주에 위치한 봉산사에 강이식 장군의 영정을 봉안해 놓고 매년 제향을 올리고 있다.
수나라의 대군을 무찌른 또 한명의 고구려 명장 강이식 장군, 비록 그에 대한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아 아쉬운 측면도 있지만 강이식 장군을 통해 당시 동북아 최강자 고구려의 기세가 어땠는지 또 중국 대륙에 맞서 어떠한 승리를 남겼고 이것이 바로 고구려의 정신인지를 알 수 있어 의미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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