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멸망을 이끈 배신자, 연개소문 아들 연남생 그는 누구인가?
우리나라의 5천년이 넘는 영광의 역사 중 가장 영광스러웠던 순간을 꼽으라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만주벌판을 점령한 고구려 시대를 꼽을 것이다. 그만큼 고구려는 우리 민족에게 자긍심을 키워주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인데, 하지만 모든 나라의 흥망성쇠가 있듯 고구려 역시 멸망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고구려 멸망에 가장 앞장섰떤 인물이 있다. 바로 연개소문 아들 연남생이다. 그는 과연 누구일까?
1. 연개소문 아들 연남생 출생과 성장
연남생은 그의 비문이 남아 있어서 고구려시대의 사람 치고는 역사 기록이 꽤 많이 남아 있는 편인데, 연남생은 고구려 왕실보다 더 강력한 권력을 장악한 신하 연개소문의 장남으로 634년 태어났다. 연개소문에게는 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 연남생, 둘째 아들 연남건, 셋째 아들 연남산이 있었고 이들은 추후 고구려의 멸망에 큰 관여가 되어 있는 주역들이기 때문에 알아 두는 것이 좋다.
여튼 연남생이 태어나 성장할 무렵, 연개소문은 이미 고구려의 모든 정권을 잡고 있는 상황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믿지 못하고 자신의 권력을 식구들에게 나누어주기 시작하는데 당연히 그 세 아들 모두 연개소문 아래에서 권력을 잡게 된다. 특히 연남생은 불과 나이 9살 되던 해부터 연개소문을 통해 벼슬을 받고 고구려 조정에 나아간다.
연남생은 9살 때 선인이라는 낮은 직책의 직급으로 벼슬에 들어온 이후 18살 때 중리소형, 23살에 중리위두대형에 봉해지는데 이 중리위두대형의 경우 나랏일을 회의 하는 최고 귀족회의라는 점에서 연남생이 얼마나 연개소문의 아들로 이른나이에 권력을 쥐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 연남생 고구려 대장군이 되다
28세때 아버지 연개소문의 권력욕 덕분에 아무것도 보여준 것 없이 고구려 삼군대장군 자리에 오른 연남생은 고구려의 병권을 거머쥔다. 연개소문의 입장에서는 병권을 자신이 믿을만한 아들에 넘겨주어야 자신의 자리가 유지되었기에 당연한 것이었지만 고구려 입장에서는 불운이었다.
2.1 신라와 동맹을 맺은 당나라 - 나당연합의 등장
이때부터는 당시 동북아의 정세를 봐야 한다. 연개소문이 당나라 태종이 이끄는 대군을 격파한 이후 당나라는 신라와 동맹을 맺고 호시탐탐 고구려를 노리고 있는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고구려와 연개소문은 오랜 전쟁을 끝으로 이제 한 숨을 좀 돌리나 싶었는데 뜻밖의 소식이 찾아온다. 바로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것이다. 이때 신라의 왕은 태종무열왕 김춘추로 일찍이 동맹을 제안했으나 연개소문이 이를 단칼에 거절하고 연금까지 했던 인물이었기에 고구려 입장에서는 긴장을 할 수 밖에 없었다.
2.2 연남생 대장군으로 군을 이끌고 맞서다
661년, 마침내 당나라는 육군과 수군을 앞세워 고구려 수도 평양성으로 쳐들어온다. 그리고 9월 고구려와 당나라는 압록강을 사이에 끼고 맞선다. 이때 고구려의 대장군은 연남생으로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크게 패하였고 연남생이 이끄는 3만의 군사는 전멸 하였고 자신만이 겨우 살아 도망쳐온다. 경험 없는 자신의 아들에게 군대를 맡긴 연개소문의 패착이었다.
연남생의 패배로 고구려의 육로는 그대로 열려버렸고 평양성은 이미 와있던 당나라 수군과 육군에게 포위 당해버린다. 그리고 이 절체절명의 순간 연개소문은 평양성 내부에서 항전을 결정한다. 때마침 와줘야할 신라군 역시 백제의 남은 세력에게 막혀버렸고 겨울까지 오면서 당나라군은 수개월간 평양성을 뚫을 수 없었다.
그리고 연개소문은 당나라가 지치길 기다렸다가 일제히 성문을 열고 공격하니 당나라 군대는 전멸하였고 이제 당나라는 고구려를 치겠다는 마음을 접게 된다.
3. 연개소문의 죽음과 연남생의 배신
당나라의 2차침략을 막아낸 후 고구려의 위상은 커졌고 평화는 찾아왔지만 연개소문이 집권 20년만인 665년 사망한다. 최고 권력자이자 고구려를 지키던 마지막 보루의 사망.. 그러나 걱정할 것은 없었다. 이미 연개소문이 장남 연남생과 나머지 두 아들에게 권력을 나누어 놓았던 것이다.
연개소문 역시 자신의 유언으로 세아들이 우애 있게 권력다툼하지 말고 고구려를 지키라는 말을 남기고 죽는다. 물론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세 아들의 우애는 좋았고 고구려 역시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세아들 주변의 측근들이 문제였다.
그런데 연남생이 지방의 성을 순찰하러 평양성을 나간 사이 남은 두 동생의 측근들이 연남생이 두 동생을 죽이려 하며 연남생에게는 두 동생이 형의 권력을 빼앗으려 한다는 이간질을 시작한다. 처음에는 연남생과 두 동생 모두 믿지 않았으나 연남생이 계속되는 이간질에 속아넘어가 자신의 밀정을 두 동생에게 보내 감시하게 했다. 그러나 이 밀정이 동생들에게 잡히게 되고 동생들은 의심이 폭발한 나머지 왕명을 칭해 연남생을 평양으로 불렀으나 연남생이 이를 믿지 않으면서 갈등이 폭발한다.
그리고 마침내 666년 연남건, 연남산은 쿠데타를 일으키 평양성을 장악하고 연남생의 아들 연헌충을 살해한다. 그리고 스스로 연남생을 몰아내고 고구려 최고의 자리인 태막리지에 오른 둘째 연남건은 연남생의 남은 세력을 없애기 위해 군대를 보낸다.
그런데 이때 이미 연남생은 자신이 도망자 신세가 되자 당나라로 가서 항복을 선언했다. 이는 이미 고구려와의 전쟁을 포기한 당나라에게는 미친듯이 반가운 일이었고 이는 마치 지금의 북한 김정은이 우리나라에 투항한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연남생은 고구려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당나라군을 인솔하여 국내성과 인근의 주요성 6곳 등을 모두 접수하였고, 이로인해 당나라는 보급로가 완성되며 고구려의 멸망시나리오가 가속된다.
4. 고구려의 멸망과 연남생의 최후
고구려의 주요거점을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점령한 당나라는 마침내 50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한다. 여기에 신라군까지 평양성에 당도하며 고구려는 2년간의 처절한 전투를 뒤로하고 멸망하게 된다. 이때가 668년이었고 고구려의 700년 역사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둘째 연남건은 고구려의 멸망을 보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으나 마지막왕 보장왕과 함께 붙잡히며 당나라라로 끌려가는 처지가 되었다. 연남생은 붙잡혀온 동생에게 마지막 정이 있었는지 유배형에 처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연남건은 목숨을 부지하고 유배된다.
연남생은 고구려를 무너트린 것에 대한 공신을 인정 받아 우위대장군에 올랐으며 3,000호가 넘는 식읍을 받는다. 또한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 귀족으로서 대접 받으며 살수 있었고 심지어 요동땅에서 고구려 부흥운동이 일어나자 유민을 달랠 목적으로 연남생이 직접 건너가 안동도호부의 관리를 역임한다.
그리고 이 안동도호부에서 46세의 나이로 병에 걸려 숨을 거둔다. 당나라는 연남생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낙양의 북망산에 매장하였고 그 장례를 성대히 치뤄 주었으며 연남생의 묘지명에는 그의 일생, 가계도 등에 대해 하나하나 기록을 남겨주는 친절함까지 베풀어준다. 얼마나 눈엣가시 같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싶었고 연남생에게 당나라가 고마워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5. 결론
고구려와 당나라의 70년 전쟁은 앞서말한 것처럼 고구려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을 수 있었지만 허무하게 절대권력자 연개소문의 죽음 이후 그 아들들의 배신으로 인해 허무하게 무너진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 연개소문이 권력을 사유화하지 않고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지 않았다면 어찌되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고구려는 최소한 당나라에게만큼은 멸망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동북아의 강자로 더 번성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삼국을 통일하는 것이 통일신라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만큼 연개소문이라는 이름에 묻혀 잘 나오진 않지만 역사에 만약이 있다고 가정할 때 그 아들 연남생의 배신과 투항은 우리 역사에서 너무 아쉬운 부분으로 남아 있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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