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규모 명나라 '정화'의 원정
인류 역사에 있어 항해를 통한 신대륙 발견과 바닷길 확보는 그 어떤 발견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항상 대항해시대는 서양의 전유물로 평가되고 있으며 동양은 단순히 유럽인들에 의해 발견된 신대륙에 불과 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서양인들이 그토록 자랑스러워 하던 대항해시대보다 훨씬 더 먼저 명나라에서 아프리카까지 대규모 원정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가? 정화의 원정 함께 알아보자.
명나라 정화 원정에 사용 된 배. 약 2500톤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함대로써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위해 꾸린 원정대가 200~ 205톤 정도였다고 하니 그 크기가 짐작 가는가? 사진 출처: http://www.flickr.com/photos/flungingpictures/2045333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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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가 궁궐에 들어오게 된 이유
정화는 홍무4년 (1371)에 운남의 곤양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가정은 이슬람을 믿고 있었다. (당시 중국의 운남 지역에는 이슬람교가 이미 많이 퍼져있었다.) 그의 아비 이름은 마합지로 무하마드의 후손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마씨를 사용했으며 합지라는 이름 역시 메카를 순례한 사람에게 붙여지는 '할지'에서 따온 이름일 정도로 이슬람교를 강하게 믿고 있었다. 이러한 가정의 분위기 때문에 정화의 어렸을 적 이름 역시 마삼보로 불리며 이슬람 문화를 일찍이 접할 수 있었다.
(이제 정화로 부르겠다.) 정화가 태어난 홍무 4년은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운지 4년되는 해로써 주원장은 중국 대륙의 대부분을 통일한 상태이긴 했지만 정화가 태어난 운남의 경우에는 중국 대륙에서도 가장 남서쪽에 있었기에 아직 명나라에 항복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후 10년이 지났을까? 1381년 (홍무14년) 마침내 주원장은 원나라의 잔존세력이 지배하고 있던 운남에 공격명령을 내리고 명나라 군대는 운남에 들이닥친다. 하지만 정화의 집안은 대대로 원나라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그의 아버지 마합지 역시 운남을 토벌하러 온 명나라 군대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고 만다.
전사한 정화의 아버지의 노력이 무색하게 원나라 잔존세력의 저항은 곧 끝이나고 운남은 명나라 토벌군에 점령 당하게 되는데 정화의 집안은 명나라에 저항을 했으므로 역적으로 몰리게 되었고 정화는 12살의 나이로 거세를 당하는 치욕을 겪게 된다. 그 후 정화는 명나라 군사에게 연행되어 당시 주원장의 넷째 아들인 연왕 주체에게 올려지는데 이것이 바로 정화가 명나라의 중흥을 이끈 영락제와 인연을 맺게 되는 경위다.
중국인들이 존경하는 위인 중 대표적 인물 '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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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 최고가 되다
정화가 궁궐에 들어오고 시간이 흘러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죽자 그 뒤를 이어 황태손인 건문제가 왕위에 올랐다. 건문제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주원장의 아들들을 몰아내기 시작하는데 바로 이때 정화가 모시던 넷째 태자 연왕 주체(영락제)가 그 야심을 드러내며 건문제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나는 이른바 '정난의 변' 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 정난의 변에서 정화는 자신이 모시고 있던 연왕 주체를 도와 정변에서 기대 이상의 공을 세우게 되고 연왕 주체가 3년의 전투 끝에 건문제를 몰아내고 영락제의 자리에 오르자 그 공을 인정 받아 '정화'라는 이름을 하사받는다.(이때까지 마삼보라 불렸다.)
이후 영락제는 태감의 자리에 임명했는데 이 관직은 이 당시만해도 환관이 오를 수 있는 최고 지위의 관직이었다고 하니 영락제가 얼마나 정화를 신임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이뿐만 아니라 영락제는 정화가 운남지역 태생인데다가 이슬람교도 였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뛰어난 성품과 지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정화에게 위대한 업적 중 하나를 맡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남쪽 바다를 향한 대항해였다.
'정화'의 원정. 인도네시아, 중동, 아프리카에 이르는 대항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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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 대항해를 시작하다!
제 1차 정화의 대항해는 영락 3년 (1405) 정화의 나이 34살때였다. 이때 정화가 거느린 선단의 규모는 거선 62척 승무원만 2만 7천 8백여명이라는 그야말로 엄청난 대 선단이었는데 특히 거선은 길이만 150미터 너비가 62미터에 달해서 지금의 8천톤급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크기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크기의 대선단은 과장된 크기로 불리며 오랫동안 신빙성이 없는 기록으로 인정되었지만 1957년 남경 교외의 보선창 터에서 거대한 키가 발견 되면서 기록된 숫자가 과장되지 않았음이 증명 되었다.)
영락제가 정화를 통하여 이렇게 대규모 선단을 남쪽 바다를 향해 내보낸 이유는 가장 먼저 명나라의 국위를 세계에 알려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받들게 하려는 이유가 있었으며 교역을 통해 새로운 문물을 얻고자 하는 이유도 있었다. 또한 정난의 변 때 행방불명된 건문제의 행방을 추적하는 목적도 있었다고 전해진다.(실제로 정난의 변 당시 건문제의 시체는 발견 되지 않았고 그가 살아 있다는 의혹들이 떠돌았다. 때문에 건문제가 동남아 여러지역에서 살고 있던 화교들을 모아 다시 영락제를 칠려고 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여튼 이러저러한 이유로 시작된 정화의 1차원정은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섬과 말라카, 실론의 항로를 거쳐 1407년 인도 캘리컷에 도달 했으며 정화는 항로마다 도착하는 나라가 있으면 명나라에 조공을 요구하기도 하고 그 지역의 문물 등을 가져오는 임무를 착실히 수행했다. 또 1차원정에서 정화는 해적으로 활동하던 해적들을 해산시키고 해적의 수뇌 중국인 진조의를 잡아 명나라로 압송해 처단하는 공을 세우기도 한다.
1418년에 제작된 지도를 기반으로 1763년에 제작된 지도 이미 중국이 아메리카 대륙은 물론 남극과 북극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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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 (1371 ~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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