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를 상대로 한 우리 민족의 위대했던 승리 봉오동 전투의 모든 것!일제를 상대로 한 우리 민족의 위대했던 승리 봉오동 전투의 모든 것!

Posted at 2019. 7. 24. 15:35 | Posted in 국사/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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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승리 봉오동 전투의 모든 것!

최근 역대급 반일감정 고조와 함께 무자비한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운 봉오동 전투가 영화로 개봉되면서 봉오동 전투에 대한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무기부터 군세까지 모두 열세임에도 목숨을 바쳐 싸운 우리 조상들의 위대한 승리는 100년이 다 되가는 지금 우리에게 어떤 귀감을 줄까? 

 

8월 7일 개봉을 앞둔 봉오동전투 영화

|봉오동전투 그 시작은? 삼둔자전투

1919년 3.1운동 이후 조선의 독립에 대한 열망에 깜짝 놀란 일제는 당시 만주에서 활발히 무력투쟁을 하던 독립군에게로 눈을 돌리게 된다. 그 중에서도 봉오동은 두만강 하구에서 약간 떨어진 마을로 당시 최진동이 이끄는 독립군의 근거지였다. 

 

봉오동은 남쪽으로 삼둔자라는 독립군의 또다른 거점과 연계되었고 백야 김좌진장군이 이끄는 부대로 잘 알려진 북로군정서는 북쪽에 위치해 있었으며 서쪽에는 홍범도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함께 있어 봉오동은 우리 독립군의 요충지이자 훈련장이었다. 

 

한편, 일제 역시 만주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밀정을 통해 첩보로 입수하고 있던바 만주에서의 독립군 소탕 작전을 준비하게 된다. 이때 당시 북로군정서 정일 제 1사령부를 이끌고 있던 홍범도 장군은 이후 있는 물자 없는 물자를 다 끌어모아 군대 및 무기 증강에 나섰으며 일제의 공격에 대한 움직임을 예측 1920년 6월 4일, 소규모의 습격대를 구성하여 1개 소대 규모의 일제의 초소를 공격하여 몰살시켰다. 이를 삼둔자 전투라고 부른다. 

 

삼둔자전투에서 독립군은 미리 매복시키고 일제와 총격전을 벌이면서 유인해와 일제히 사격 60명 정도의 일본군을 사살하였다. 이에 일제는 곧바로 제 19사단의 1개 대대 야스가와 지로 소좌가 인솔하는 월강추격대대를 편성하여 간도로 들어간다. 전쟁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봉오동전투 전개 

일제의 월강추격대대의 출병에 홍범도, 최진동 등은 열세 병력으로 일제와 맞서 싸우기 위해 꼭대기 고지에서 일제를 쳐부술 계획을 세우고 곧바로 작전에 나선다. 이때 월강추격대의 병력은 약 250명 정도로 알려져 있으며 두만강을 건너 남봉오동에 도착하였으며 거리낌 없이 독립군이 매복해 있는 봉오동 입구로 진입하였다. 

 

이후 독립군은 주변 산악고지대에 매복하면서 월강대대의 본진이 들어오길 기다린다. 이후 안산전투, 고려령 전투 등 크고 작은 전투를 거치면서 일제는 봉오동의 깊숙한 곳까지 향하게 된다. 이때 미리 매복하고 있던 우리 독립군은 최진동을 사령관으로 홍범도를 연대장으로 정한후 봉오동 산악고지 사방에 매복진을 꾸리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일제의 본진이 들어오자마자 사방에서 일제히 사격을 가한다. 이때 기상상태 역시 독립군의 손을 들어주며 안개와 비로 인해 시야가 흐려진 일제는 아군에게 오인하여 서로 사격을 가하는 등 혼란에 빠졌으며 독립군은 이를 놓치지 않고 일제 사격을 가해 최종전투에서 일본군 전사자 157명 부상자 300여명을 내었다. (물론 월강추격대의 병력이 250명이라는 기록을 볼 때 어느 정도의 과장이 있을 수도 있으며 정확한 사상자 통계는 아니다.)

 

|봉오동전투 결과와 의의

봉오동전투의 승리로 일제는 자존심에 치명상을 입고 간도지방의 독립군 뿌리를 뽑고자 만주로 출정할 구실을 만들었으며 이는 이후 청산리대첩이라는 우리 독립군의 위대한 승리의 도화선이 되기도 한다. 또한 봉오동전투 이후 우리 독립군의 사기 진작은 물론 만주와 연해주 곳곳에서 우리 독립군들이 창설되기 시작하며 우리 독립군의 무장투쟁에 큰 밑거름이 된다. 

 

물론 우리 독립군의 봉오동에서 전과에 각기 다른 기록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단순히 일본군을 사살하고 부상을 입힌 숫자를 넘어 일제 시대 내내 이어진 우리 무장투쟁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후 청산리대첩의 승리까지 이어진다는 점은 봉오동전투의 가치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또한 당시 의병수준을 생각하고 덤볐던 일제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았으며 추후 일제가 주제도 모르고 훈춘 사건을 조작하여 중국 출병의 빌미를 제공했던 바, 세계사적으로도 나름의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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