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동양

중국과 러시아의 만남 네르친스크 조약

윤여시 2015. 10. 13. 23:11
반응형

중국과 러시아의 만남 네르친스크 조약


중국과 러시아는 나름 공산주의부터 시작해서 인연이 많은 나라다. 지리학적으로도 꽤많은 영토를 맞대고 있고 현대사에서 동맹국에서 위기론까지 있을 정도로 다사다난한 두 국가이다. 때문에 중국과 러시아가 첫 대면한 네르친스크 조약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하겠다.


<러시아 제국의 시베리아 점령>


|배경


러시아는 지금도 그렇지만 원래 유럽에 있고 싶어하는 나라이고 또 중요도시들 역시 대부분이 유럽에 속해있다. 하지만 정작 러시아의 광활한 영토인 시베리아는 모두 아시아쪽에 있는 것도 아이러니이다. 여튼 러시아 제국이 세워진 후 16세기 말부터 러시아는 동쪽으로 눈을 돌려 원정과 탐험을 하게 되는데 몽골제국의 칸 왕국들을 부수며 17세기 초에는 이미 중국과 우리나라의 국경까지 다가오게 된다. 


특히 청나라 초기에는 청나라 안에서 벌어진 삼번의 난이라든지 여러 내란의 틈을 타 아시아 동부 지역의 흑룡강 상류지대에 진출해 네르친스크와 알바진 등지에 진지를 구축하고 영토를 차지하기에 이른다. 그중에서 알바진은 흑룡강 북쪽 연안에 위치한 곳으로 수상 교역의 중심지였는데 이곳을 점령한 러시아는 살인과 약탈을 감행하여 그곳에 살고 있던 다후르족을 학살하고 나머지를 인질로 끌고 가는 사건을 일으키는 등 깡패짓을 서슴치 않는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청나라에서는 삼번의 난이 일어나 대부분의 병력이 남쪽에 파견되었기 때문에 러시아 제국의 이 같은 행동을 견제할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삼번의 난이 평정된 강희 21년 1682년 심기가 불편했던 강희제는 러시아 제국의 동태를 조사하고 대처방안을 강구 하기 시작한다. 



 

|러시아와 청나라의 전투


1685년 마침내 청나라는 알바진을 차지한 러시아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청나라 군사 1만 5천명이 알바진을 포위하자 숫적으로 열세인 당시 러시아군 사령관 토르푸친은 항복을 요청하였다. 이에 강희제는 러시아 제국의 침략을 견제했다는데 의의를 두고 포로로 잡은 러시아 장병들을 모두 석방한 후 다시는 침략하지 않도록 타이르고 본국으로 보냈는고 토르푸친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일단 철수 했다. 


그러나 청군이 러시아 진지를 모두 파괴한 뒤 회군 했다는 소식을 듣자 토르푸친은 곧바로 알바진에 다시 진지를 구축했는데 강희제는 이 소식을 듣고 화를 참지 못하고 러시아 제국이 점령한 알바진에 총 공격을 명한다. 다음해인 1686년 청나라는 대군을 이끌고 알바진을 공격하였고 사령관 토르푸친은 항복할 겨를도 없이 전사한다. 


사태가 이지경에 이르자 러시아 황제는 태도를 바꾸어 강화를 맺고 국경선을 정하자는 국서를 보냈고 강희제 역시 그해 9월 정전을 명하였다. 이후 강화 교섭은 네르친스크에서 열기로 했으나 1688년 갑자기 뜻밖의 변수가 생긴다. 


<몽골의 세력확대>


|몽골의 세력 확대


강화교섭 사절이 네르친스크에 다다를 무렵 몽골 중가르부의 수장 가르단의 기병이 몽골 초원지대를 휩쓸고 청나라 사절이 네르친스크를 향해 가는 길을 막게 된다. 이에 강희제는 사신들을 다시 본국으로 소환 하게 된다.


사실 원나라가 멸망한 후 몽골 세력은 내몽골과 북부의 가르카 몽골, 서부의 에르트 몽골의 3부로 갈라졌는데 에르트 몽골은 그 후 명나라 중엽에 이르러 오이라트부로 바뀌었고 '토목의 변'에서 명나라를 대파하며 그 세력이 확대되었다. 명나라 말기 오이라트부는 인구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독립된 4부로 다시 갈라지는데 위에서 말한 중가르부, 호쇼트부, 도르베트부, 토르구트부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중가르부의 수장 가르단은 형의 뒤를 이어 수장의 자리에 오른 후 강대한 병력을 방패로 삼아 다른 3부와 위구르 등 여러 부족을 점령 억압했는데 때마침 이때가 청나라 사신과 러시아 제국의 사신이 만나기로 한 때였던 것이다. 


한편 청나라에서는 가르단의 세력이 커지자 러시아 제국과 연합하여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까 노심초사했고 이를 막기 위해 강희제는 적의 세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서둘러 사신을 러시아 제국에 보내 네르친스크에 대한 러시아의 영유권을 인정한다는 기본 입장에서 국경선을 책정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네르친스크 조약이다. 네르친스크 조약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네르친스크조약 내용


- 흑룡강의 외지류인 고르비차 강과 외홍안령을 양국간의 국경선으로 한다.

- 국경을 넘은자에 대한 처벌은 해당국의 법으로 한다.

- 양국 민간인의 자유 교역 허용

- 영구히 화평하도록 한다.


<네르친스크 조약을 통해 정해진 국경선>


|네르친스크 조약 이후 러시아와 중국의 영토 관계


이후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합의된 양국의 경계는 1727년 캬흐타 조약으로 다시 한번 보완이 되었으나 19세기말 청나라의 국력이 쇠약해지고 러시아 제국의 힘이 강해졌을 때 러시아가 일방적으로 아무르주와 연해주를 설치하고 1858년 아이훈 조약을 맺어 이곳을 공동통치지로 만들었다가 1860년 베이징 조약에서 모두 빼앗아 버려 오늘날의 중-러 국경선이 완성되게 된다.


이후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중국의 힘이 다시 강성해지자 네르친스크 조약을 빌미로 중국이 러시아에게 연해주를 반환하라고 요청했으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990년까지도 영토에 대한 두나라 분쟁이 가속화 되기도 했다. 이후 2005년 러시아가 섬 몇개를 중국에 넘기는 것으로 두 나라의 영토분쟁은 사라지게 된다.


또한 후일담으로 강화교섭을 반대 했던 가르단을 정벌하기 위해 강희 35년 친히 대군을 일으키고 가르단 군대를 철저하게 분쇄했는데 가르단은 계속 추격하는 청군을 피해다니다가 음독자살 하였다. 이렇게 해서 강희제는 외몽골을 완벽하게 정복했고 200년동안 외몽골은 완전히 청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