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동양

한나라 비단길의 개척 장건 실크로드

윤여시 2016. 1. 7.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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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비단길의 개척 장건 실크로드


흔히 많은 사람들이 빠르고 쉬운 무역로를 가리켜 비단길, 실크로드라고 부른다. 그만큼 비단길, 실크로드는 지금도 많은 이익을 낼 수 있는 길, 무역의 대명사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비단길의 어원을 찾으려면 바로 한나라 장건을 통해 알아봐야 한다.


   <장건의 여행로와 실크로드>



|한나라의 외교정책으로 시작된 비단길 개척


기원전 202년 진나라의 폭정에 들고 일어난 유방은 항우를 무찌르고 한나라를 세워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고조 유방이 중국본토를 통일하고 북쪽의 흉노 선우(부족장을 가리키는 말)를 정벌하는데 처참하게 패하면서 군사적으로 대하기보다는 화친과 회유정책을 통해 외교관계를 이어온다. 


그러나 기원전 141년 제 7대 황제 무제가 즉위하면서 한나라는 그야말로 전성기를 이루었고 이제 흉노를 단순히 회유와 화친이 아닌 군사적으로 굴복시킬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마침내 BC133년 한무제는 30만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흉노를 정벌하려 했으나 흉노 군신선우에게 들켜 시도도 하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간다. 이에 한무제는 압도적인 군세로도 흉노를 정벌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고 자신들의 힘만이 아닌 동맹국이 있다면 쉽게 흉노를 정벌하지 않을까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게 된다.


특히나 즉위 초기 한무제는 투항한 흉노인을 통해 중요정보를 입수했는데 이는 바로 당시 월지가 흉노의 묵특선우에게 패해 서쪽으로 도망갔다는 소식이었다. 뿐만 아니라 흉노의 노상선우때에는 아예 월지왕을 살해해 두개골을 술잔으로 삼았다는 소식도 듣게 되었고 한무제는 월지의 복수심이 불타올랐을 것이라 판단 연합하기 위해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있는 대월지를 찾을 사자를 보내야 했다.



<장건>


|장건, 대월지로 떠나갈 사신에 지원하다


대월지로 가는길은 멀고 험난했다. 솔직히 말해 대월지로 가는 길 자체가 어디있는지 몰랐고 더 큰 위험은 그 길을 가로 막고 있는 흉노족이 문제였다. 때문에 한무제는 믿을 수 있고 지혜로운 자를 보내야만 했고 한무제는 사자로 떠날 사람을 널리 모집했다. 그리고 이때 장건이 자원을 했고 한무제는 장건에게 흉노 출신 감부(甘父)를 길잡이로 붙여주고 이외에 100여 명을 이끌게 하여 월지를 향해 떠나게 했다. 장건이 출발한 시기는 기원전 139년경쯤으로 추정 된다.


|장건, 흉노에게 붙잡히다


그러나 출발한지 얼마 안되어 흉노땅을 지나던 장건에게 불행이 닥쳤다. 바로 황하 서쪽 변경지방에 이르러 흉노땅에 들어서자마자 흉노병사에게 잡혀 흉노 군신선우 앞에 끌려가게 된 것이다. 흉노의 군신선우는 이미 장건이 월지를 찾아 이곳으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장건이 자신을 섬기길 바라며 억류하고 흉노에 살게 했다. 여기에 흉노 여인까지 주어 장건은 흉노땅에서 아들까지 낳으며 살아야 했지만 장건은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고 흉노에서 10년을 살아야 했다. 


장건이 흉노에 살면서 어울리게 되다보니 자연스럽게 장건에 대한 감시는 약해졌고 장건은 기회를 모색하다 그의 가족들과 함께 월지를 찾아 도망을 가게 된다. 무작정 서쪽을 통해 월지를 찾아 떠난 장건은 지금의 러시아 페르가나 지방의 대완이라는 나라에 도착하게 되었다. 대완은 다행스럽게도 장건에게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고 장건에게 말과 통역을 붙여주며 월지로 떠나는 길을 알려주기까지 했다. 장건은 강거를 거쳐 지금의 타지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사이의 강에 위치한 월지국을 마침내 찾아가게 된다.


|장건, 월지를 찾다


하지만 천신만고 끝에 찾은 월지국은 자신이 생각했던 나라가 아니었다. 먼저 그 위치가 연합하기에는 불가능할 정도로 한나라와 떨어져 있었고 둘째로는 이미 주변의 대하국을 점령하며 비옥한 토지에서 풍요롭게 살며 흉노에 대한 원한을 이미 잃어버렸던 것이다. 사실 대하는 그 옛날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을 점령할 때 남긴 그리스의 흔적이 있었는데 장건은 처음으로 서양의 문명을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잡기도 했지만 장건의 본래 목적은 탐험이 아니었기에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장건, 한나라로 돌아가다 


이에 장건은 단념하고 한나라로 돌아가기 위해 동쪽으로 향하게 되는데 운이 나쁘게도 다시 흉노에게 붙잡혀 1년 가까이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장건은 1년동안 흉노에 억류 당하면서 흉노의 상세한 정보들을 알 수 있었다. 바로 군신선우가 죽고, 흉노의 좌곡려왕이 흉노의 태자를 공격하는 내란이 벌어졌다는 소식이었다.


여튼 이러한 내란을 틈타 장건은 흉노인 아내, 부하 감보와 함께 한나라로 귀환 할 수 있었다. 무려 출발한지 13년만에 장안으로 귀환한 것이다. 장건이 황궁안으로 들어오자 한무제를 포함한 많은 신하들이 대성통곡 할 정도였다 하니 영화도 이런 영화가 없다.


<장건의 원정, 장건출사서역도 한무제가 말 위에서 손을 들어 장건에게 명령을 내리고 

장건이 무릎을 꿇고 있는 장면>


|장건, 흉노를 정벌하는데 앞장서다 


여튼 이러한 장건의 흉노에 대한 정보력과 임무를 끝까지 해낸 장건이 보여준 충성심은 한무제의 마음을 흔들기에는 충분했고 장건에게 태중대부의 벼슬을 내린다. 이에 장건은 한무제에게 자신이 보았던 서쪽의 수많은 나라에 대한 정보와 풍습을 말하는데 대완, 대하, 월지, 안식, 조지, 신독(인도) 등 당시 서역의 나라에 대한 귀중한 정보들이었다.


여튼 한무제는 이러한 장건을 교위로 삼아 대장군 위청을 따라 흉노정벌에 나서게 된다. 장건의 기가막힌 정보를 바탕으로 흉노족 세력 깊숙히 진군한 한나라 군대는 마침내 흉노를 정벌하게 되는데 기원전 121년 흉노의 혼야 왕은 마침내 한나라의 곽거병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하게 된다. 물론 이와중에 이광과 함께 장군으로 출전한 장건은 행군을 지체하여 이광의 군대를 위기에 빠트려 장군직을 박탈 당하기도 했지만 서역의 전문가로서 무제의 신임을 받아 무사히 넘기기도 한다. 


|장건, 서역에 길을 개척하다


장건은 흉노 정벌 후 월지 대신 오손과 연합하기를 바랬고 기원전 119년 장건을 오손으로 파견한다. 일행 300명과 함께 오손을 비롯한 서역의 많은 나라에 보낼 재물들을 앞세워 떠난 장건은 당시 내부 권력다툼과 흉노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한 오손을 움직이는데는 실패했지만 오손의 사자 수십명과 서역에 한나라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기원전 115년 귀국한다.


이러한 원정길을 통해 장건은 서역과 한나라라를 잇는 접점을 확보하게 되고 이후 수많은 나라들이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수교를 맺는 더욱더 큰 파급력을 갖게 한다. 또한 그가 서역을 향해 떠난 길은 일명 비단길, 실크로드라 불리며 동서 교통로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이를 통해 상업은 물론 문화적 교류가 지속되면서 더 찬란한 발전을 이룩할 수 있게 된다. 


특히 실크로드를 통해 멀리 로마까지 떠난 중국 비단들로 인해 로마 경제가 파탄 직전까지 간적도 있다 하니 장건의 비단길 개척이 얼마나 위대한일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장건, 비단길 개척으로 들어온 물건들과 우리나라의 꿈


장건은 동양의 문물을 서역에 알리고 서역의 많은 문물을 동양에 알리는데 큰 이바지를 했다.  이는 서역뿐 아니라 당시 유럽을 호령하는 로마에도 영향을 끼쳤고 산호, 공예품, 향료, 석류, 포도 등 다양한 물건들을 들여 왔다. 


그가 만들어낸 비단길은 현대판 실크로드라 불리며 우리나라의 통일 이후 펼쳐질 시베리아 횡단 열차나 유럽으로 가는 땅길이 뚫리는 우리나라의 또 다른 희망으로도 다가오고 있다. 2천년도 더 된 비단길이 우리의 또 다른 꿈이자 새로운 희망으로 불리고 잇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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