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동양

실패로 돌아간 청나라의 무술변법운동

윤여시 2015. 11. 14.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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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로 돌아간 청나라의 무술변법운동


우리나라의 갑오개혁과 비교되는 것으로 곧 잘 나오는 청나라의 무술변법운동은 낡은제도를 타파하고 근대식 개혁을 하자는 목소리에서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무술변법운동은 정확히 어떤 것이었을까?


<무술변법운동을 이끈 강유위>


|무술변법운동의 배경


아편전쟁과 청일전쟁에서 잇따라 패배한 청나라는 이같은 패배가 서구 열강에 비해 뒤떨어진 무기 때문이 아니라 구시대적인 정치와 뒤따르는 부패 때문이란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때문에 부패한 정치를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력하게 일어났고 이 같은 세력의 대표적인 지도자가 바로 강유위였다. 


강유위는 광동성 남해현 출신으로 일찍부터 서구 열강들에게 잇따라 굴욕적인 패배를 맛보는 청나라의 사정에 참담함을 금치 못했고 25세 때였던 1882년, 과거에 낙방하자 틀에 박힌 공부보다는 각종 유럽의 새로운 문물을 일찍 받아들이기로 하고 사학, 불교뿐 아니라 기존의 고리타분한 유교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독자적인 유교학설을 펼칠 정도로 많은 공부를 하게된다. 


그는 청일전쟁이 끝난 후인 1895년 제자 양계초와 함께 과거를 보기 위해 북경에 올라갔다가 일본에게 요동, 대만을 할양하고 2억냥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조약을 맺은 나라의 소식에 분개한 나머지 '강화조약의 거부, 무조건 적인 항전, 변법의 실행' 등을 골자로한 상소문을 작성하여 과거를 보기 위해 북경에 있는 수많은 선비들에게 서명하도록 설득한다. 


강유위의 이러한 설득은 당시 선비들에게 호응을 받기 충분한 내용들이었고 순식간에 1천여명의 선비들이 서명을 하게 된다. 강유위는 곧바로 변법 상소를 조정에 올렸으나 당시 상소문을 임금에게 전달하는 부서인 도찰원에서는 강유위와 선비들이 관직이 없다하여 이를 조정에 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내용이 워낙 훌륭하고 당연한 것이며 선비들의 서명이 있었던만큼 당시 조정에서도 큰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 했다. 이때가 음력 3월이었다.


<광서제>


|강유위 조정에 들어가다


얼마후 과거에 급제한 강유위는 정치적 의견의 자격을 확보하자마자 여러차례 변법에 관한 상소를 올린다. 1898년 무술년에는 <일본변정고>라는 저서와 함께 상소를 올리는데 보수적인 대신들에 의해 광서제에게 전해지지도 않다가 겨우 광서제의 눈에 띄게 된다.  


사실 광서제는 이미 자신이 정치적인 실권을 가질 수 있는 성년이었지만 서태후에게 그 실권을 모두 빼았겼는데 지극히 보수적인 서태후의 지나친 정치 간섭은 광서제에게는 불만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광서제는 강유위의 변법에 공감하며 매우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서태후가 있는한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청일전쟁에서 대패하면서 서태후 정권에 대한 분노와 뜨거운 여론이 서태후 세력이었던 이홍장을 실각시켰고 서태후 역시 이화원으로 물러나 겨우 광서제의 친정체제가 성립되긴 했으나 서태후와 보수파들은 경계를 절대 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이라도 광서제는 이 때를 놓치지 않고 강유위의 변법 상소를 받아들이는데 움직임을 보였고 강유위의 끈질긴 상소에 더욱 확신이 든 광서제는 서태후로부터 자립하여 변법을 단행할 결심을 하게 된다. 광서제는 4월 23일 조서를 발표하고 다음날 강유위를 입궐토록 하여 변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뒤총리아문 장경 자리에 임명했다. 여기서 장경이란 대신을 보좌하는 직책이었다. 특히 총리아문에는 이홍장을 비롯한 10명 가까운 정권 대신들이 있었는데 황제로부터 직접 대권을 부여 받았으므로 강유위에 대한 광서제의 대우가 얼마나 파격적인지는 알 수 있다. 



<서태후>


|강유위 변법을 진행하다


아무리 강유위와 광서제가 변법을 강하게 추진한다 하지만 당시 조정의 보수파 즉 서태후 세력의 권력은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고 언제 자신들의 변법 추진을 방해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따라서 강유위는 과거 시험을 보던 때 자신의 변법 상소문에 서명했던 동지들을 불러 모아 보국회라는 정치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이때 그의 제자 양계초가 큰 활약을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를 바탕으로 강유위는 변법 추진에 필요한 건의를 추진 하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중앙관제를 대폭 축소하고, 무능력한 관료를 정리하며, 행정절차를 간소화하는 등의 정치 행정개혁 


2. 새로운 학문을 배우는 신학교를 수립하고 그 졸업생에게 과거합격증을 줌으로써 과거제를 폐지하는데 앞장 섰으며, 역서국을 설치해 서양 서적을 널리 번역해 보급하는 등의 교육개혁 


3. 무과를 폐지하고 근대식 군대 체제를 수립하는 군사개혁 


4. 상공업을 진흥하며 철도 부설, 화폐 통일, 조선소 설립 등을 추진하는 산업개혁 


5. 이 밖에 여성의 전족을 금지하고 한족과 만주족의 차별을 없애며 새 수도를 건설하는 등의 파격적인 개혁안 등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강유위의 적극적인 행보에 심기가 불편해진 것은 서태후와 변법파들이었다. 그들은 먼저 광서제에게 강유위를 추천했던 호부상서 옹동화를 파면시키는데 앞장서면서 광서제와 개혁파들을 향한 정치적 대립을 이끌기 시작한다.


이에 광서제 역시 서태후의 눈치를 살피던 예전과는 다르게 변법의 시행을 서두르고자 변법에 소극적인 인물들을 파면하고 변법에 의지를 보이는 네 사람을 군기대신 장경에 임명했다. 이들은 양예, 유광제, 임욱, 담사동으로 모두 재상과 같은 권한이 주어지는 파격적인 인사정책이었다. 


<서태후가 머물던 이화원>


|강유위 서태후를 몰아낼 계책을 세우다


서태후는 광서제가 변법을 빠르게 시행하려 하자 변법파에 일격을 가할 움직임을 보이게 되는데 이를 간파한 강유위의 변법파들은 서태후의 움직임을 막는데 초조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이 서태후에 못미친다는 것을 간파하고 서태후를 유폐시키고 광서제의 친정체제를 확립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했다.


하지만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력을 앞세운 군대가 필요했고 변법파는 신식육군을 쿠데타에 끌어들이기 위해 위안스카이(원세개)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신식 육군을 통솔하단 위안스카이는 서태후 일파이자 실각으로 잠시 물러난 이홍장의 자식과 같은 존재였고 변법파도 이를 고민했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다. 


이에 변법파는 원세개에게 걱정반 기대반 마음을 가지고 9월 18일 담사동을 통해 원세개를 방문하게 한다. 이자리에서 담사동은 원세개에게 신식군대를 요청하며 서태후가 있는 이화원을 포위해달라고 요청하게 되는데 원세개가 주저하자 담사동은 만약 거절할 경우 자신은 물론 원세개도 이자리에서 죽고 죽이겠다는 반협박적인 말까지 하며 강경하게 요청한다.


이에 원세개는 담사동의 허리부분과 목덜미 부분이 솟아 있는 것을 보고 그자리에서 자신을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 일단 승낙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담사동이 떠나자 원세개는 이해득실을 따진 후 변법파를 저버리기로 결심하고 직례총독 영록에게 이를 밀고하였고 영록은 이화원으로 달려가 서태후에게 이를 고하게 된다. 


이소식을 들은 서태후는 분노하였고 변법파와 보수파 사이에 치열한 혈투가 벌어지게 되는데 군사력에서는 이미 보수파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담사동이 원세개를 방문한 다음날인 9월 19일 영록과 원세개는 북경으로 올라와 포진했고 서태후 역시 9월 20일 새벽 이화원에서 자금성으로 복귀하여 광서제의 방을 수색하고 변법에 관련된 문서를 모두 압수했다. 



<원세개 위안스카이>


|백일천하로 끝난 무술변법자강운동


9월 20일은 광서제가 일본의 이토히로부미를 만나야 했기에 서태후는 잠시 장막 뒤에 숨어서 감시하다가 밤이 되자 광서제를 불러 음독 자결할 것을 명했다. 이에 황족들이 울며불며 간청하여 겨우 자결은 면하고 유폐를 가게 되었고 9월 21일 서태후의 수렴청정이 다시 시작되면서 변법 운동은 103일만에 막을 내렸다. 이를 백일유신, 무술정변이라고 부르며 조선의 갑오개혁이 삼일천하로 끝난 것과 비슷한 결과를 맡게 된다. 


서태후와 보수세력은 권력을 다시 잡자마자 변법파에게 가혹한 처벌을 내리기 시작한다. 


|무술변법자강운동의 실패 이후 강유위 


사실 담사동이 원세개를 만나던 9월 18일, 강유위는 원세개의 가담이 어려울 것을 예상하고 9월 20일 새벽 남몰래 북경을 떠나 신제호라는 배에 탑승하였다. 하지만 9월 21일날 출항한다는 정보를 들은 강유위는 다시 중경호로 갈아 탔는데 강유위가 도망쳤음을 안 영록은 군함 비응호를 보내 강유위를 추격했다. 하지만 비응호마저 석탄의 부족으로 도중에서 돌아오고 말았는데 영록은 즉시 연대도를 지키는 장관에게 전보를 쳤다. 중경호가 연대도에 잠시 기항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유위가 탄 중경호는 이미 연대도에 기항하였다가 전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출항한 뒤였고 상해에 기항했지만 당시 상해의 영국 총영사가 강유위와 친교가 있는 영국인 리처드의 요청을 받아들여 영국의 순양함 보나벤처 호를 보내 강유위를 옮겨 태워 홍콩으로 호송하였다. 이렇게 강유위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 했고 이토히로부미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망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웃긴 것은 십수년이 지나 중화민국이 세워져서 고국 땅에 돌아왔으나 청나라 왕조를 다시 세워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한다거나 여성에게 자유를 주면 안되며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이상한 행보를 보이며 말년에 욕을 왕창 먹는다. 


<담사동>


|무술변법자강운동의 실패 이후 담사동


강유위의 제자였던 양계초는 일본 공사관으로 무사 피난하여 일본군함 오지마를 타고 그대로 일본으로 갈수 있었다. 


그러나 담사동은 일단 일본 공사관으로 도망치긴 했으나 그것은 자신의 시와 책을 양계초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였는데 양계초가 함께 망명을 하자고 했으나 담사동은 이를 거절하고 체포되어 일주일 후인 9월 28일 북경에서 참수 된다. 양계초에게 전한 담사동의 일종의 유서 절명서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 있었다.


'피를 악물고 이 글을 써 우리 중화국민에게 고한다. 다 함께 의롭게 일어나 국적을 섬멸하고 우리 성상을 보전하라.'


여튼 무술변법자강운동은 이렇게 끝이 났고 우리나라의 갑오개혁과 비교되어 실패한 대표적인 개혁정책으로 알아두면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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