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조선을 세운 정도전의 대표 측근으로 그 최후까지 함께한 남은

윤여시 2015. 11. 10.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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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을 세운 정도전의 대표 측근 남은

 

고려말 조선초의 정도전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지만 그와 함께 조선을 세운 동지들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인물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정도전의 대표 측근이자 후에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는 남은 역시 대표적인 인물로 이번 <육룡이나르샤>에서도 인상깊은 등장을 보여주었다.

 

육룡이나르샤 <남은>

|남은의 출생과 성장 그리고 정치 입문


남은의 어릴때 행적이나 성장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남은은 고려 공민왕 3년 1354년 검교시중을 지내던 남을번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록에 따르면 계책 세우기를 좋아했고 호탕하며 자유 분방한 성격이라고 전해진다. 스무살때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처음 올랐으며 왜구가 급증하여 고려의 동해와 남해를 괴롭히자 삼척 군수에 지원하여 왜구를 무찌르며 이름을 알렸다고 전해진다.


이후 조정에서도 남은의 공로를 인정 남은을 불러드려 사복정으로 임명했고 당시 고려의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정도전, 조준, 이성계 등의 신진사대부 대열에 합류했다. 이후 우왕과 최영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1388년 요동정벌 반대에 이성계 등과 함께 주청하였으나 이것이 받아드려지지 않자 하는 수 없이 참여해 위화도까지 진군했지만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고민하자 남은은 이에 동조하여 회군에 힘을 실었고 필요한 명분을 만들면서 큰 공을 세우게 된다.

 

이후 정도전과 함께 이성계를 새로운 왕조의 왕으로 추대할 생각을 갖게 된다. 

 

 

 

|남은 조선 개국공신 반열에 오르다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 세력이 우왕을 폐위하고 창왕마저 폐위하며 고려의 마지막 왕이 될 공양왕을 즉위시키는데 남은 역시 목소리를 낸다. 

 

남은은 위화도 회군부터 세운 공을 인정 받아 급속도로 조정의 중심인물로 되어 갔다. 이성계가 해주에 간 사이 공양왕이 고려를 지키려던 정몽주와 손을 잡고  탄핵을 하면서 조준, 정도전, 윤소종과 함께 유배 되었지만 1392년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살해되자 다시 복귀하여 마침내 이성계를 왕위에 올리며 조선을 세운다.  이때 폐위되는 고려 공양왕의 앞에서 이를 선포하는 교지를 읽은 사람이 남은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남은의 최후 이방원과 멀어지다

 

건국직후 남은은 그 공로를 인정 받아 출세가도를 달렸으며 정도전과 함께 뜻을 같이하며 정계에서 한 목소리를 낸다. 특히 이성계의 둘째 부인 신덕왕후의 소생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데 정도전과 함께 주창하여 이방원과 멀어지게 되었는데 "태조 이성계가 계룡산을 수도로 정할까 고민하며 터를 둘러보고 돌아올 때에 이방원이 남은의 장막에 들어가니 남은이 말하기를 '이제부터 내 장막에 들어오지 마시오'라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395년 정도전이 요동 공격에 대한 의지를 태조 이성계에게 전하자 남은은 정도전의 목소리에 힘을 실었고 세자나 공신들의 사병 혁파 문제에 대해서도 같은 목소리를 내며 정도전과 그 정치적인 뜻을 함께 했다. 그러나 자신의 태자자리를 동생에게 빼았겼다 생각한 이방원은 이방석과 정도전 세력을 상대로 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며 기습 선제 공격을 가했고 그 결과 이방석은 물론 정도전, 남은 역시 이방원에게 주살 당하게 된다. 


이때 기록에 따르면 이방원이 기습하여 정도전을 사로 잡을 때 정도전이 머물렀던 곳이 남은의 첩 집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정도전은 그 자리에서 죽고 남은은 도주에 성공 했으나 스스로 자수 했다가 참형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기도 용인에 있는 남은의 묘>

 

|남은의 기록

 

이방원은 남은을 죽이긴 했지만 정도전과는 달리 가족이나 친척에게 연좌제를 적용하지 않았으며 그의 형과 동생 들을 관직에 등용하였으며 세종 즉위 후에는 태상황에 있으면서 남은의 과보다는 공을 중시 여겨 영의정에 추증시켰고 세종때는 태조의 묘에 함께 배향 되기도 하였다. 남은의 형 남재는 아이러니하게도 태종 이방원의 심복으로 이후 영의정을 지냈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남이 장군 역시 남재의 후손으로 알려졌다. 

 

정도전과 끝까지 함께한 정치적 동지로 그의 친화력과 정치력은 대단 했으며 세자문제로 이방원과 뜻을 달리하며 죽음을 맞긴 하지만 조선개국 가운데 큰 힘을 발휘했던 인물인 것만은 분명하다. 육룡이나르샤에서 남꼴통으로 표현되며 그 강직함이 잘 표현 된 것 또한 바로 이 때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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