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이인좌의난 이인좌 그는 누구인가?
조선의 왕 중에서도 훌륭하다 평가 받는 영조. 나름 살기 좋았던 그 시절에도 반란사건은 일어난다. 영조를 큰 충격으로 빠트렸던 이인좌의 난, 이인좌 그는 과연 누구일까?
<드라마 대박 이인좌>
|이인좌의 출생
이인좌는 세종대왕의 네 번째 아들 임영대군의 10세손으로 나름 왕족 중의 왕족이다. 할아버지는 관찰사 이운징이며 어린시절에 대한 기록은 찾기 힘드나 왕족 가문임과 동시에 관찰사를 지낸 할아버지 덕분에 어린시절 교육이란 교육은 제대로 받지 않았을까 싶다.
특히나 그는 당시 권세를 잡고 있던 소론의 영수 윤휴의 손녀를 아내로 맞이하며 출세의 정점을 찍는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되자, 당시 전라감사로 있던 이인좌의 조부 이운징이 실각하고 백조부 이의징은 사사되는 몰락의 길을 겪게 된다.
때문에 실제 이인좌는 관직에 나아갈 길이 막혀 있었고 더욱이 조부와 백조부가 죽은 이후 가세가 기울어 상주로 옮겨 살아야만 했다.
|이인좌 난의 배경
이인좌의 난에 대해 알아보기 전 영조가 왕위에 오를 당시 정치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숙종과 장희빈에서 태어난 아들인 경종이 1720년만에 왕위에 올랐을 때 집권하고 있던 남인과 소론은 숙종과 숙빈 최씨(드라마 동이로 잘알려진 인물) 사이에 태어난 영조(당시 연잉군)을 견제하고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하지만 영조는 이를 필사적으로 버텨내며 그를 지지하는 노론들의 보호 아래 목숨을 부지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경종은 몸이 좋지 않아 후계도 없이 왕위에 오른지 4년만인 1724년만에 죽고 마는데 이에 영조가 노론을 등에 업고 왕위에 오르게 된다.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노론세력은 자신들을 억압했던 남인과 소론에게 복수를 하기 시작하고 김일경, 목호룡 등 남인을 사형에 처한다.
이러한 이유로 박필현, 이유인, 심유현 등 남인과 소론과격파들은 경종의 죽음에 영조가 독살을 했다는 소문을 퍼트리고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에 대한 무수리 시절 유언비어를 퍼트렸다.또한 그들은 이에 멈추지 않고 아예 왕위를 엎어버리고자 반란을 모의하게 된다.
<이인좌의 난>
|이인좌 난 일어나다
남인과 소론 과격파들은 서울을 비롯해 경기도 여주, 양성, 충청도 충주 청주는 물론 경상도 안음과 상주 , 전라도 태안까지 반란 세력들을 결집시키는 최대 규모의 반란을 준비하게 된다. 이들은 충청도, 호남, 영남에서 반란을 먼저 일으키고 경기군이 한양을 공격할 때 북상하여 세를 규합 영조를 몰아내고 소현세자의 자손이었던 밀풍군 이탄을 왕위에 앉히기로 한다.
이때 이인좌는 1726년 상주에서 반란을 모의하고 있는 박필현과 투합하고 반란을 준비하게 된다. 이처럼 은밀하고 나름 정밀한 계획까지 세우며 차근차근 한양을 점령할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영조는 1727년 불안한 정국을 눈치채고 당시 실각해있던 온건한 소론을 일부 고용하는 탕평책을 실시한다. 또한 이때문에 당시 반란을 은밀하게 추진하던 남인과 소론 등은 다시 조정으로 나갈 길이 열리자 분열하게되고 과격한 소론을 제외한 온건 소론파들은 다시 조정에 복귀하게 된다.
그러나 이인좌 등은 위험을 무릅쓰고 기존의 계획대로 반란을 강행하게 되는데 지역별 당파별로 전국에서 군사를 몰아치면 한양에서 호응하는 것으로 알고 1728년 3월 15일 청주에 집결한다. 사실 이인좌가 모든 반란을 일으킨 것은 아니므로 사실상 이인좌의 난보다는 무신년에 일어나 무신란이라고 부르는게 맞을 수도 있으나 이인좌는 청주를 함락시키고 경기도로 진군하는 등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이인좌의 이름을 붙여 이인좌의 난이라고 한다.
<이인좌의 난을 토벌한 오명항>
|이인좌 난의 진행과 결말 그리고 최후
이인좌가 이끄는 반란군이 청주에 집결하자 청주지역의 남인과 소론 세력은 열렬히 호응하였는데 그들은 장례행렬을 가장하여 청주성 북문 숲속에 이르렀고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미리 약속을 한 충청병영 비장 양덕부, 병영 기생 월례가 성문을 열어 반란군을 성안으로 들어오게 한다. 이때 충청병사로 있던 이봉상, 군관 홍림, 남연년 등이 체포 당하여 살해 되었는데 이때 이봉상은 바로 충무공 이순신의 5대손으로 알려져있다.
여튼 청주성을 접수한 이인좌는 여러 고을에 격문을 띄워 반란의 타당성은 물론 반란군에 가담하길 동참하였고 경종의 위패를 설치하여 밤낮으로 참배하면서 반란의 타당성을 알렸다. 이인좌는 또한 3월 21일 드디어 서울로 진격을 실시하는데 24일 안성에서 처음 만난 오명항의(오명항 역시 소론 출신으로 영조의 탕평책에 의해 조정으로 돌아온 인물이었다. 영조의 탕평책이 빛을 발한것이다.) 토벌군에 참패하였다. 이에 이인좌는 죽산에서 마을 사람들에 의해 생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능지처참에 처해진다.
또한 이인좌가 이끄는 반란군이 패하자 청주지역의 노론들은 의병을 일으켜 반란군을 상대로 토벌에 나서는데 이곳에서 셋째 동생 이기좌 등의 목을 베며 반란을 진압한다.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키자 함께 호응하여 일어난 경상도 호남지방에서도 반란이 일어나는데 정희량이 이인좌의 동생과 함께 3월 20일 호남에서는 박필현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모두 쉽게 진압되고 만다.
<영조>
이처럼 영조의 집권초 일어난 이인좌의 난은 나름 무사히 진압되었지만 영조 집권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이인좌의 반란으로 인해 영조는 노론 중심의 인사정책 보다는 소론을 중심으로 탕평책을 시행하게 된다. 여기에 반란으로 집권에 위기를 느낀 노론 역시 영조의 탕평책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덕분에 영조의 업적중 하나로 안정적인 탕평책이 꼽힐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후 이인좌의 난으로 인해 노론의 힘은 더욱 막강해져 일당체제가 이어지고 이는 곧 조선 후기 조선의 몰락을 가져온 세도정치로도 이어지는 원인이 되어버리기는 원인으로도 꼽히는 사건으로도 알려져 비판을 받는 사건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드라마 <대박>에서 이인좌의 난과 이인좌가 어떻게 소개 될지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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