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꽃과 동학농민운동, 녹두장군 전봉준 그는 누구인가?녹두꽃과 동학농민운동, 녹두장군 전봉준 그는 누구인가?

Posted at 2019. 5. 7. 11:18 | Posted in 국사/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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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꽃과 동학농민운동, 녹두장군 전봉준 그는 누구인가?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꽃에 앉지마라... 라는 시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애절하고 구슬픈 이 시의 주인공은 바로 동학농민운동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전봉준으로 최근 드라마 녹두꽃이 방영 되면서 전봉준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높아지고 있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압송 장면, 유일한 그의 사진이다

|전봉준 그의 유년시절은 어땠을까?

1855년 출생인 전봉준은 조선 후기 급증한 전형적인 몰락 양반 가문에서 출생한다.한약방이나 서당 등을 통해 생계를 이어나가긴 했지만 이미 가세가 기울어진 상태에서 가난한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러한 가난함 속에서도 전봉준의 어린시절은 상당히 영특하고 머리가 좋기로 소문난 수재 였다고 전해지긴 한다. 

무엇보다 키가 유난히 작아 (1m 50cm를 약간 상회) 어렸을 때부터 녹두(콩)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는데 이것이 추후 전봉준하면 꼭 따라다니는 녹두장군에도 영향을 주었다. 

 

여튼 그는 가난한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서당에서 훈장으로 활동 하였고 시장에서 상인으로도 활동 하는 등 청소년기부터 다양한 일을 했다고 전해진다.  

SBS 드라마 <녹두꽃>에 등장한 전봉준

|전봉준 그는 어떻게 농민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나?

그는 30대에 이미 동학에 들어가 접주의 자리에 있었으며 이를 통해 조선 후기 혼란스러운 사회속에서 참혹하게 수탈당하던 백성들을 바라보며 어느 정도 개혁의 꿈을 품고 있었다. 

 

* 동학은 서학에 대립하여 1860년 최제우가 만든 것으로 당시 피폐했던 조선 후기,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하며 사람은 본래 하늘의 성품을 지녀 사람이 곧 하늘이고 하늘이 곧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인본주의 사상의 학문이다. 이같은 사상은 조선 후기 착취 당하던 수많은 백성의 열망을 담은 것으로 순식간에 그 세를 늘려 나간다. 동학에서 접주는 교구의 책임자라고 생각하면 되며 담임목사 정도로 생각하면 좋을 듯 하다.)

 

그러던 1893년,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이 당시 지독하기로 소문난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병갑에 맞서 저항을 하다가 조병갑 모친상 때 부조금 2천 냥을 안거뒀다는 이유로 곤장을 맞고 이로 인해 사망에 이르게 된다. 이때 전봉준은 동학농민운동을 통한 사회를 바꾸겠다는 생각을 먹었으리라 짐작된다.

여기에 조병갑은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백성들을 착취하여 건설하고 사용료마저 수탈하는 등 백성의 고혈을 짜기 시작했는데, 참고 참았던 전봉준은 나라를 개혁하겠다는 포부를 안고 1894년 농민들 1천명과 함께 만석보를 헐어버리고 관아를 습격해 백성에게 곡식을 나누어준다. 

 

이 같은 농민들의 봉기에 깜짝 놀란 조선 조정에서는 조병갑과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상황수습 부장이라 생각하면 좋을 안핵사 이용태를 내려보냈으나 이용태마저 포악한 횡포를 부리자 전봉준은 김개남, 손화중, 차치구와 함께 약 8천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동학농민군의 4대 강령과 봉기를 알렸다.  

 

동학농민운동

|제1차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마자 수많은 농민군들이 합세하면서 그 규모가 상당해졌으며 전주성 함락을 목표로 진을 쳤다 이후 4월 중앙 관군을 격파하고 전주성을 점령하며 농민군의 위용을 보여준다. 

 

하지만 당시 멍청한 조선 조정이 자신들의 백성을 탄압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문제는 다시 커지게 된다. 이후 일본군까지 톈진조약을 빌미로 조선에 파견하면서 전봉준은 12개의 항목을 들어 개혁할 것을 제안하며 조선 조정과 전주 화약을 맺고 잠시 휴전을 하게 된다.

 

<전주 화약 개혁 내용>

  1. 불량한 양반의 죄를 조사하여 벌줄 것
  2. 노비 문서를 소각할 것
  3. 천민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패랭이를 없앨 것
  4. 불법적으로 거두어들이는 세금을 없앨 것
  5. 일본인과 내통한 자를 엄중하게 처벌할 것

*톈진조약은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 내정간섭이 심화되자 조선을 식민지 삼으려던 일본과 조약을 맺게 되는데 일본은 조선에 대한 청과 동일한 파병권을 갖는다는 것이 주 골자가 된 조약이다.

 

|제2차 동학농민운동, 그리고 최후  

전주 화약 이후 사태는 결국 청나라 일본간의 전쟁인 청일전쟁으로 번지게 되고 일본이 청나라를 상대로 압승하면서 이후 일본은 조선 조정 간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당시 동학군은 전국에 집강소 (동학농민운동 이후 설치된 개혁기관)를 설치하고 전주화약을 바탕으로 한 개혁 실천을 위해 노력 하고 있었는데 일본의 조선에 대한 야욕에 분개하고 다시 한 번 봉기를 하게 된다.   

 

이때만큼은 1차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던 동학의 북접도 합세하여 한양으로 진군을 시작한다. 사실 동학의 제2대 교주가 이끌던 북접은 전봉준의 남접을 마땅치않게 여겼지만 일본군의 패악이 극도에 다다르자 함께 입을 합쳐 전쟁에 임하게 된다. 이들이 이끌던 군사만 전봉준의 12만 북접 손병희의 10만의 군사를 합쳐 도합 22만에 다달았다고 하니 그 위세가 대단했다. 

 

그러나 공주 우금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일본의 기관총을 비롯한 잘 훈련된 군사에게 처참하게 패하면서 전봉준은 도피하는 신세가 되었고 순창에서 다시 군대를 모아 재기하려 했으나 옛 부하의 김경천의 밀고로 인해 체포되어 도성으로 압송 동학농민운동의 동지였던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과 함께 사형을 당하고 만다. 

 

|전봉준의 최후 그 후.

전봉준이 사형 당한 후 그의 시신은 동지들과 함께 현재 단국대학교 죽전캠퍼스 근처 야산에 버려진 것으로 추정되며 그의 형제들은 연좌제로 끌려 사형을 당했고 그의 후처는 노비로 전락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또한 전봉준의 이러한 이야기는 우리가 잘알 고 있는 노래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라는 민요로 만들어서 전해질만큼 그의 정신이 후세에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또한 그는 흥선대원군의 복권을 위한 열망이 넘쳐 흘렀던 인물로 그의 개혁요구서 및 탄원서 등에서 흥선대원군의 복권에 대한 내용이 많이 담겨져 있어 이를 뒷받침한다. 이는 당시 서양이나 일본 등이 조선 조정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반감과 일찍이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의 성격 등이 비슷하다는 것을 봤을 때도 어느정도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전봉준 그리고 그가 이끌었던 동학농민운동은 조선 후기 처참한 백성들의 삶에 대한 실상과 무능력한 조정, 그리고 지정학적으로 가치가 있었던 조선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던 세계 열강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역사적 현실이었으며 이를 막으려 했던 우리 백성들의 처절한 사투라고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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