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세조는 왕으로 인정하지 않겠소! 사육신 성삼문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19. 8. 11.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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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는 왕으로 인정하지 않겠소! 사육신 성삼문 그는 누구인가? 

조선시대에서 아마 가장 임팩트가 큰 시대가 조선 세조 때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일까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신의 조카를 죽이면서까지 왕위를 차지했던 세조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세조 때 또 하나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있다 바로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그 조카 단종 복위를 꾀하면서 세조를 몰아내려다 실패한 비극적인 사육신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 사육신을 대표하는 인물 성삼문. 오늘은 그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사육신 성삼문
성삼문 영정

|성삼문 그는 누구인가? - 성장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성삼문은 고려 말 충신 최영 장군과 같은 고향이라고 한다. 성삼문은 탄생설화가 하나 있는데 바로 그가 태어날 때  하늘에서 별안간 '낳았느냐'라는 소리가 세번이나 들렸고 세번째에 성삼문이 태어났다고 하여 이름이 세번의 물음이라는 성삼문이라 전한다. 물론 정사는 아니고 설화이니 이 부분은 참고 바란다. 

더 재미있는 것은 성삼문이 태어나고 그 할아버지 성달생이 점을 보았는데 충신이라는 말이 나와 집안을 말아먹을 놈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여튼 성삼문은 똑똑한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18살에 이미 생원시 합격 21살에 이미 문과에 급제하여 당시 천재들이 모여 있던 집현전 학사로 뽑혀 비로소 세종을 보게 된다. 이때 성삼문과 집현전에 들어온 젊은 인재들은 

신숙주, 박팽년, 하위지, 이개 등으로 신숙주를 제외하고 후에 성삼문과 함께 그 뜻을 함께하는 인물들이 많았다. 

 

성삼문 동국정운
동국정운

 |성삼문 그는 누구인가? - 집현전 시기

 

성삼문의 집현전 시기는 훗날 사육신으로 함께한 동무들과 연구하고 세종의 명을 받아 진행했던 편찬작업이 주였고, 어쩌면 이때가 성삼문의 가장 행복했던 때가 아닐까 싶다. 

특히 세종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를 준비했던 것이 그것이고 훗날 세조의 편에 섰던 신숙주와는 요동을 밥먹듯이 오고가며 음운학을 연구했다. 또한 한자음을 정리한 동국정운 역시 바로 집현전 동무들과 함께한 업적이었다. 

 

|성삼문 그는 누구인가? - 계유정난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했지만 문종의 몸은 한없이 허약했다.  문종은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듯 그의 어린 아들 세자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김종서, 황보인 등에게 단종을 잘 부탁한다는 뜻을 전하고 급사한다. 이후 단종이 왕위에 올랐지만 결국 다들 아는 것처럼 세조가 난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단종에게서 왕위를 물려 받으니 이것이 바로 계유정난이다. 

 

계유정난 이후 세조는 집현전 학사들에게 공신 명단을 내리는데 이는 세조의 회유책일 가능성이 높다. 그 이유는 성삼문이 계유정난 직후 자신을 비롯하여 정난에 참여하지 않은 신하들에게 공신을 내리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며 말을 한 것이 그 이유다. 여튼 계유정난 이후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은 빠른 진급을 하였으며 승정원 동부승지라는 정 3품까지 오르게 된다.

 

조선 성삼문

|성삼문 그는 누구인가? - 단종 복위를 꾀하다 사육신 그 죽음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다시피 수양대군에게 물려줄 때 성삼문이 그 옥새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전해주면서 그렇게 대성통곡을 하였다고 한다.  뭐 세조가 그 모습을 보고 성삼문은 일찍부터 찍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위에서 본 것처럼 그 진급이 오히려 빨라진 것으로 봐서는 실제 역사에 기록 된 것인지는 의문이다.

여튼 세조가 왕위에 오르고 얼마 후 성삼문, 박팽년을 필두로 한 단종 복위 운동에 대한 거사 계획이 세워졌다. 그리고 1456년 6월 1일 명나라 사신이 한양에 와 세조를 접견하면서 연회가 열릴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 날을 거사일로 정한다. 

성삼문과 박팽년은 연회장의 호위무장격인 운검을 성상문의 아버지인 성승과 유응부로 임명되면 거사를 시작하고 세조와 그 세력을 모두 참살하려 한다. 그런데 세조가 별안간 별운검을 연회에서 제외하면서 거사는 실패로 돌아간다. 

 

이때 유응부는 별운검 없이 난을 일으키자고 하였으나 성삼문이 후일을 기약하자고 했다고 전하는데, 이를 본 김질이 거사가 앞으로도 실패할 것이라고 직감 자신의 장인인 정창손에게 거사 계획을 털어 놓아 성삼문을 비롯 사육신 모두가 잡히게 된다. 

 

사육신 의절사
의절사

|성삼문 그는 누구인가? - 사육신이 되다

거사 실패후 가족과 함께 자결을 택한 유성원을 제외하고 모두 주포된 사육신은 국문과 함께 모진 고문을 받는다. 국문 당시 성삼문은 세조에게 왕이라 하지 않고 나으리라는 표현을 하면서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고 한다. 이에 세조는 그 화를 참지 못하고 쇠를 달구어 성삼문의 다리를 뚫고 팔을 자르게 했다고 전하는데 성삼문은 더욱더 당당하게 나으리라고 전하며 세조의 분노를 더하게 했다. 

더 대단한 것은 세조 옆에 절친한 벗이었던 신숙주가 서있었는데 성삼문은 신숙주에게 옛 집현전 이야기를 꺼내며 배신에 대한 호통을 했다고 전한다. 또한 성삼문은 그간 세조가 녹봉으로 내린 양식들을 절대 취하지 않아 집에 그대로 쌓여 있었는데 이것으로만 봐도 단종을 향한 그 충절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다. 

세조의 취조에도 성삼문은 박팽년과 자신의 아버지만이 거사에 참여하였으며 그 동료였던 강희안은 진실로 어진사람이며 거사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고해 강희안은 풀렸다고 전한다. 여튼 거사에 참여한 모든 인물들은 온몸이 찢기는 거열형을 넘어 삼족이 멸족을 당하게 된다. 

여기에 당시 상왕 자격으로 남아 있던 단종 역시 이일에 연루되며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떠나게 되니 사육신의 거사는 결론적으로는 처참하고 비극적인 실패였다.

 

비록 비극적인 실패였지만 사육신의 죽음은 후대에 지속적으로 복권운동이 일어날만큼 대단했다. 이후 정조대에 이르러 관직복구와 시호가 내려졌으며 노량진에 조선육신이라는 신도비가 세워지며 지금도 노량진 공원에 사육신 묘와 함께 충절의 대표 장소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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