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 보다는 고려에 대한 충심이 먼저? 이성계의 적장자 진안대군 이방우효 보다는 고려에 대한 충심이 먼저? 이성계의 적장자 진안대군 이방우

Posted at 2021. 10. 26. 23:20 | Posted in 국사/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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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 보다는 고려에 대한 충심이 먼저? 이성계의 적장자 진안대군 이방우

태조 이성계의 수많은 아들 중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낸건 5번째 왕자 이방원이었다. 맏이부터 우선으로 하는 전통이 있었음에도 이방원이 이성계의 진정한 후계자가 된 것이다. (물론 둘째 정조 이방과가 있긴 했지만 이방원이 명목상 세운 왕이기에 패스!)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적장자를 가장 우선으로 생각하는 옛날의 전통에 전혀 맞지 않는 결과였다. 과연 이성계의 적장자 진안대군 이방우는 누구였을까? 

 

드라마 <정도전> 속 이성계와 이방우

|이방우의 출생과 관직생활

이성계의 정실 부인이었지만 조선이 건국되기 1년 전 사망한 신의왕후 한씨는 6남 2녀을 낳았는데 그 중 가장 첫 째가 이방우이다. 

 

어려서부터 효가 지극하고 형제들과 우애가 돈독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만큼 맏이 역할을 돈독히 한것으로 보인다. 관직에 나아가 예의판서(조선 예조판서,지금의 교육부장관)와 밀직부사(특명대사)를 지냈다.


태조의 아들중에 과거를 급제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인물은 다섯째 태종 이방원과 여섯째 덕원대군 이방연이었던지라 음서로 관직에 오른 것으로 추측되나 예의판서와 밀직부사를 아무나 맡을 수 없기 때문에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갔다는 말도 있다.

 

드라마 <육룡이나르샤> 이방우

|위화도회군과 이방우에 대한 기록

이방우의 기록이 많은 편이 아니지만 이성계의 의형제 이지란이 쓴 <청해백집>에는 이방우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성계와 조민수가 요동정벌에 나섰을 당시 고려 우왕은 평안도 성천에서 이방우와 이방과(정종) 및 이지란 등 이성계의 측근들을 체포했다. 이는 요동정벌 내내 불만이었던 이성계의 진군 속도를 채근하기 위함이었는데, 이성계는 비가 쏟아지는 위화도에서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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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이방과가 이방우에게 말하길 '형님 탈옥하여 아버지에게 지금 사실을 알리십시오'라고 했다. 그러나 이방우는 '임금의 명을 어기는 것은 효가 아니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자 이방과는 탈옥하여 위화도로 갔으며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면서 성천에서 측근들을 풀어주었다. 이때 이방우가 풀려나와 이성계의 말을 잡고 '회군은 절대 안됩니다'라고 만류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이지란이 쓴 <청해백집>은 조선왕조실록처럼 인정 받은 정사가 아닐뿐더러 개인이 쓴 것이기 때문에 100% 사실을 썼다고 확인하기는 힘든점이 있다.

 

용의눈물에서 이방우

|공양왕 이후 이방우에 대한 기록

위화도회군 이후 이방우는 우왕의 폐위와 함께 그 아들 창왕의 옹립을 위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이성계가 창왕이 아닌 공양왕을 우왕의 다음왕으로 선택하고자 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여튼 창왕과 공양왕이 폐위되고 1392년 조선이 세워지자 이방우는 진안대군에 봉해진다. 실록이 아닌 야사에 따르면 조선이 건국되고 이성계가 자신의 직계가족들을 모두 불러모은 자리를 마련했다고 하는데 오직 이방우 가족만 참여치 않았다고 전한다. 상식적으로 조선사회에서 부모에 대한 불효도 이런 불효가 없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방우는 '효보다 충이 먼저라며' 조선 건국을 반대까지 했다고 하니 이성계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다.  

 

물론 정사인 실록에서는 이방우가 이성계의 명을 받아 사대선조를 위해 제향하고 신주로서 안치하는 등 맏이의 역할을 했으며 이성계의 동북면 사병까지 관리했다는 기록이 있어 과연 이방우가 진정으로 부모와는 정반대의 길인 고려의 충신의 길로 향했는지는 의문이다. 

 

 조선을 거부하는 이방우 (매체에서 이방우는 명백한 고려의 충신이다)

|이방우의 죽음

이방우는 조선 건국 후 1년이 지난 1393년 사망한다. 실록에 따르면 '소주를 좋아하여 날마다 마셨고 소주를 마시다 그로 인해 병을 얻어 죽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위화도회군 이후 술만 마시며 살았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 이유가 망국 고려에 대한 충절 때문인지 혹은 왕세자에 밀려났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방우가 고려에 대한 충절로 조선 왕실을 버리고 은둔하여 생을 마감했다는 설과 창왕 옹립에 참여하고 당시 권문세족인 지윤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고려의 대신인 이색의 손자 이숙묘를 자신의 사위로 맞아들이는 등 고려와 맥을 같이하는 행보를 여럿보인점 등으로 인해 왕세자의 경쟁에서 밀려나서 이성계의 장자였지만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설이 지금도 대립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뭐 두가지 이야기 어떤 것이 사실이든간에 결국 이방우는 맏이임에도 세자가 될 수 없는 점은 명백하다.


그럼에도 드라마에서 거의 대부분 이방우를 고려의 충신이라 묘사하는 점은 그만큼 무너져가는 망국 고려와 떠오르는 조선의 대비를 드라마틱하게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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