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이성계의 사병에서 정승까지 광주시 퇴촌의 지명 유래 조영무

윤여시 2021. 11. 7.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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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사병에서 정승까지 광주시 퇴촌의 지명 유래 조영무 

언제나 시대가 격변하면 개천에서 용나듯 신분 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 고려말 이성계의 사병에서 조선초 무신으로서는 최초로 정승반열에 오른 인물이 있다. 바로 조영무이다. 한양 조씨의 시조이자(아니라는 설도 있음) 경기도 광주시 퇴촌의 지명 유래가 되기도 한 인물 조영무 그는 과연 누구일까?

 

조영무 초상

|조영무의 출생과 조선 개국 전 일생

1338년 함경도 영흥군에서 태어난 조영무는 본래 본관이 그의 출생지 영흥에서 왔으나 그의 사후 조영무 아들 조서가 한양으로 본관을 옮기며 한양조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양조씨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조영무계의 한양조씨가 갑자기 본관을 도용했다고 보고 있다. 

그의 젊은 시절은 눈에띄지 않으나 이성계의 사병 중 하나로 그 이름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후 본격적으로 역사에 그 이름이 나온 것은 1392년 태종 이방원의 명을 받아 조영규(이름은 비슷할뿐 친척은 아니다) 와 함께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참살한 이후부터이다. 그리고 그 해 조선이 세워지자 조영무는 개국3등공신 한산백에 오른다. 

 

|태종 이방원의 심복으로 - 제1,2차 왕자의난에서 공을 세우다

정몽주 척살 이후 태종 이방원의 책사이자 장수로 활동하던 조영무는 당연히 이방원의 정적 정도전과 부딪힐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정도전은 왕자들뿐 아니라 개국공신들의 사병혁파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조영무는 이에 불만을 품었고 1398년 1차 왕자의난 당시 이방원의 수족 노릇을 제대로 하며 정사공신 1등에 봉해졌다. 

또한 1차 왕자의난 당시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박포를 유배시키는데 일조 했으며 1400년 이방간이 박포의 꾐에 빠져 제2차 왕자의난을 일으키자 군사를 이끌고 이방원을 도와 다시 한 번 공신에 봉해진다. 이성계 입장에서는 자신이 사병때부터 선발하여 키운 조영무가 이방원을 도운다는 것에 매우 배신감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이후 태조 이성계는 조사의의 난을 통해 조영무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황급히 몸을 피해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태종 이방원 총애를 받다 - 벼슬 생활

정몽주 척살부터 1,2차왕자의난에서 이방원을 돕기까지 생각해보면 이방원의 모든 고난을 함께한 인물이기에 조영무는 공신은 물론 이방원의 총애를 한몸에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방원은 명을 내려 공신 등 사병 혁파를 실시했는데, 조영무는 사병혁파가 실시 될 때 무기를 수납하는 군관을 폭행하였고 유배길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감히 킬방원이라 불린 이방원의 명에 제대로 들이 받은 것이다. 그럼에도 조영무는 곧 풀려나 평양부윤으로 갔으니 이방원이 상당히 총애했던 인물로 보인다. 

 

또한 조영무는 출궁한 궁녀를 첩으로 삼으면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는데, 당시 궁녀의 경우 왕의 여자였기 때문이다. 물론 출궁했다고는 하나 이 역시 불경죄로 치부되었고, 사간원 등에서 상소를 통해 조영무의 탄핵을 고했다. 그러나 이방원은 오히려 조영무를 감싸며 '이씨 사직의 신하이자 나의 원훈'이라는 표현을 쓰며 조영무를 감싸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총애를 바탕으로 조영무의 벼슬생활도 나름 평탄했다고 전해진다. 앞서 말한 군관 폭행 등을 제외하고는 문제를 일으킨적이 없다고 전해지며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 문하우정승, 병조사 등을 겸임했다가 한산부원군에 오르기도 한다. 조선왕조 최초의 무관 출신으로 정승 반열에 오른 것이다. 

 

이는 바꿔 말하면, 자신의 처가도 권력 앞에서는 용서치 않았던 태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거만하지 않고 무탈하게 벼슬생활을 잘했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을 기록한 것을 보면 '소박하고 공정하며 바른 말을 잘했다'고 전할 정도이니 태종이 가히 신임할만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조영무의 묘

|조영무의 죽음

조영무는 1413년 태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직을 내고 경기도 광주로 내려간다.

 

이곳에서 또 다른 공신 이숙번과 만남을 갖는데, 자신의 생애에 후회는 없으나 이방원의 처가인 민씨형제의 억울한 죽음에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은 후회한다 말하며 이숙번의 태도 등을 비추어 볼 때 앞날에 고생하겠다고 말한다. 이숙번은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다가 1417년 함양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조영무의 나름 신중한 벼슬생활에서 나온 경험이라 할 수 있는 예측이었다. 

이후 1년 뒤, 1414년 숨을 거두며 경기도 광주 지금의 퇴촌에 묻힌다. 토마토로 유명한 광주 퇴촌은 조영무의 호에서 따와 지어진 것이다. 

 

그의 사후에도 태종이 조영무를 아껴서 전해진 일화가 있다. 

 

조영무의 사후 넷째 아들 조윤이 조영무가 사망한 뒤 한달도 되지 않았는데 기생과 동침을 하였고, 태종은 이를 엄히 어겨 그 아들 조윤을 장 100대로 다스렸다. 4년 후, 조윤은 억울하다며 세종때 이르러 신문고를 울렸으나 세종은 '그때 변명을 하지 않고 시간이 지난 지금 신문고를 울리는 이유'에 대하여 물으며 조윤을 엄히 다스리려 하였다. 

그러나 태상왕이었던 태종이 조윤을 살려줄 것을 세종에게 청하면서 조윤은 벌을 받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태종이 얼마나 조영무를 아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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