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희극인줄 알았지만 비극이었던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

윤여시 2021. 11. 9.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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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극인줄 알았지만 비극이었던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 

조선 영조와 사도세자의 비극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비정한 아버지 영조, 그러나 만약 어머니까지 아들을 버린 것이라면? 여기 자신의 아들을 포기해야만 했던 영빈 이씨의 삶이 있다. 궁녀에서 후궁으로 신분 상승을 하고 왕위를 잇는 아들까지 낳았지만 끝내 비극으로 끝나야만 했던 삶.. 한 번 알아보자 

영화 사도에서 영빈 이씨

|영빈 이씨 - 빈에 책봉되고 아들까지 낳다

영빈이씨는 1696년(숙종 22년) 태어났다. 이후 1701년 6세의 어린 나이에 궁녀로 뽑혀 들어오게된다. 숙종은 어린 영빈 이씨를 보며 '사대부 집 여자아이들은 어린티가 많은데 조숙하구나'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영빈 이씨는 일찍부터 철이 단단히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1726년,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인 31살의 나이로 영조의 승은을 입고 아이를 갖게 되면서 숙의에 책봉된다. 이 아이가 바로 장녀 화평옹주이다. 화평옹주를 낳은 후 귀인이 된 영빈은 이후에도 둘째, 셋째 옹주를 계속 낳고 마침내 정1품 영빈에 오르게 된다. 


이후 1732년 넷째 옹주를 낳고 다음해 화협옹주를 얻게 되는데 이때 둘째, 셋째, 넷째 옹주는 5살도 되기 전에 빨리 죽고 만다. 이처럼 영빈 이씨가 계속 옹주를 낳고 그 옹주들마저 빨리 죽자 영조는 근심을 하게 되는데, 이는 정빈 이씨와 얻었던 효장세자가 죽고 그의 뒤를 이을 후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간절함 때문일까 1735년, 영빈 이씨는 마침내 아들 사도세자를 출산한다.

 

영조 가계도

|사도세자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사도세자가 태어나자 근심가득했던 영조는 기쁨에 빠진다. 드디어 자신을 이을 후사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영조는 옳다구나 하고 바로 다음해에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의 양자로 입적하여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리고 그 해 영빈 이씨는 영조가 정말 아꼈다고 전해지는 막내 화완옹주까지 낳게 되며 장밋빛 미래가 열리는 듯 했다.


그러나 영조가 끔찍히 아꼈던 장녀 화평옹주가 아이를 낳다 죽고, 화협옹주마저 홍역으로 죽게 된다. 일전에 이미 딸 3명이 다섯살도 넘기지 못하고 죽었으니 이에 남은 자식은 결국 사도세자와 막내 화완옹주가 전부였다. 

문제는 사도세자였다. 사도세자는 영조와 계속 갈등을 일으켰던데다가 정신병으로 인한 기행까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서 그 골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해진다.

 

여기에 사도세자는 자신의 후궁 경빈 박씨를 살해하는가 하면 자신의 아들이자 세손인 정조까지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러자 영빈은 세손 정조를 살리고자 사도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낱낱히 고해바치니 결국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즉, 자신의 아들을 살려달라고 말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잘못을 영조에게 고해바쳐 아들을 죽게 만든 모든 짐을 평생 얻고 살아야 할 결정을 내린 것이다. 영빈은 사도세자가 죽고 '자식에게 하지 못할 짓을 했다며 내 무덤에는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한 많은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영빈 이씨의 죽음

사도세자가 죽고 영빈 이씨는 남은 세손을 지키며 정성을 다해 돌보며 지키려 애썼다고 한다. 사실 아들 사도세자는 역시 영빈 이씨가 직접 낳았음에도 적통의 왕비였던 정성왕후 서씨에게 입적되었기 때문에 제대로 기르지 못했기도 했고 자신의 아들을 죽였다는 죄책감 때문에라도 손자 정조에 대한 지극정성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러나 영조 40년 정조 역시 이미 죽은 효장세자에 입적되면서 영빈 이씨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의 3년 상이 끝난 바로 다음날인 1764년 7월 26일, 향년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영빈 이씨의 자녀 중에 자신보다 오래 산 사람은 오직 화완옹주 한명뿐이었고, 화완옹주 역시 정조대에 이르러 서인으로 강등되고 쫒겨나 평민으로 격하되는 삶을 살았기에 그녀의 자손은 모두 불행을 겪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영조는 영빈이씨의 죽음을 슬퍼하며 직접 지문을 지었는데, 이는 조선왕조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후에 손자 정조가 의빈성씨를 위해 지문을 짓게된다) 또한 영조는 사도세자와 영빈의 일을 기록한 <표의록>을 작성하는데 이 표의록에는 사도세자를 비판하는 영빈 이씨의 고변이 임금과 종사를 위해 내린 결단이라며 한껏 영빈 이씨를 치켜세우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면서 영조는 영빈의 묘는 서교의 연희궁으로 정하라고 말하는데 지금의 연세대학교가 있는 곳이다. 이후 1969년 영빈 이씨의 묘는 고양의 서오릉으로 그 자리를 옮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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