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간신에서 충신으로 원주 변씨 시조 고려 무신 변안열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21. 11. 22.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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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에서 충신으로 원주 변씨 시조 고려 무신 변안열 그는 누구인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했던가? 원주 변씨의 시조로 고려사에서 간신명단에 올라간 인물이 있다. 바로 고려 무신 변안열이다. 정몽주가 추모했다는 고려의 충신이자 홍건적과 왜구 등을 무찌른 명장 변안열 그는 과연 누구일까? 역사속에 가려진 변안열에 대하여 알아보자 

 

드라마 <정도전> 변안열

|출생과 활약 

변안열은 1334년에 원나라 선양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대은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원나라 선양으로 1351년 원나라 무과에 급제한 뒤 선양에 있던 공민왕과 노국공주를 모시고 고려로 들어와 정착한다. 원나라가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았을 때, 고려인들은 원나라로 건너가 벼슬을 했고 그 자손이 고려로 돌아오는 경우가 있었으니 변안열이 온 것도 그런 이유라 하겠다. 

고려에 온 후 원주 원씨와 혼인하고 원주를 관향으로 받아 원주변씨의 시조가 된다. 1362년 홍건적이 개경까지 쳐들어오자 안우 휘하에서 홍건적을 무찌르고 개경을 수복하는 1등 공훈을 세웠다. 1374년에는 최영과 함께 탐라의 왜군을 격퇴하였으며 1374년 우왕 즉위 후 전라도 도지휘사가 되어 1376년에도 부령에서 왜군을 격파하는 등 공을 세운다.

 

이후 1380년 이성계와 황산대첩에서 왜군을 크게 격파하며 그 명성과 공이 자자했고 원천부원군 판삼사사까지 오르게 된다. 

 

변안열 초상화

|위화도회군 이후 

홍건적과 왜구들을 연달아 격파하며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변안열은 1388년 이성계, 조민수 등과 요동정벌에 나섰다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한다. 하지만 우왕을 폐위하려는 이성계 세력에 반대하였고 커져가는 이성계 세력을 견제하려 했는데, 이때 변안열의 사병 규모만 약 2만에 달했다고 하니 이성계로써도 위협이 되는 존재였다. 

 

변안열은 특히 위화도회군 조준이 던진 전제개혁안을 이색, 조민수 등과 함께 반대하였는데 이는 이성계와는 정치적으로 뜻이 맞지 않으며 고려를 지키겠다는 입장이었다. 또한 이성계 세력이 반대했던 창왕 옹립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며 아예 이성계와는 돌아서게 된다.

그리고 1389년 이성계의 생일날, 이방원이 그 유명한 하여가를 통해 정몽주와 변안열이 무너져가는 고려를 버리고 새롭게 함께 하자는 권유를 하지만 우리가 잘알고 있듯 정몽주는 단심가를, 변안열을 불굴가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정몽주의 단심가는 지금도 잘 알려져 있지만 변안열의 불굴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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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 구멍 뚫고 새끼줄로 길게 꿰어/ 앞뒤로 끌고 당겨 갈리고 찢길망정 너희들 하는대로 내 사양치 않으리라/ 내 임금 빼앗는데 나는 굽힐 수 없다.” - 변안열 불굴가-

 

|변안열의 최후

1389년 우왕이 귀양지에서 이성계를 제거하고 다시 우왕을 복귀시키려 했던 계획이 탄로난다. 김저가 우왕을 귀양지에서 알현하자 우왕이 울면서 자신이 곽충보와 사이가 좋으니, 그대가 계획을 세워 이성계를 없애라고 지시한다. 이 소리만 들은 김저는 곽충보에게 계획을 말했지만 곽충보가 앞에서는 함께한다고 하고 이성계에게 이 내용을 전하니 곧 김저를 붙잡아 고문을 한다. 

그런데, 김저의 입에서 변안열을 비롯해 우현보, 이색 등의 이름이 나오게 되고 변안열은 한양에 유배되었다가 1390년 처형 당한다. 변안열이 죽고 2년 뒤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 등 고려 3은은 변안열을 기렸는데 특히 정몽주는 제문을 직접 올린다.


"늠름하기가 추상 같고 열렬하기가 충렬이고 백일 같음은 의절이었다. 어느 날이든 감히 잊겠는가' 라고 올렸다한다. 

|간신에서 충신으로 

변안열은 고려사에 간신으로 기록되었다. 이는 비슷한 시기와 비슷한 행보를 보인 포은 정몽주가 고려의 충신으로 기록된 것과는 다른 기록이다. 아무래도 '고려사'가 조선 초 승자의 시각에서 쓰이다보니 이성계와 맞섰던 변안열이 왜곡된 것으로 추정된다.

 

변안열은 양주 주엽산에 묻혔으나 1468년, 광릉과 가깝다는 이유로 지금의 남양주 진건읍로 이장되어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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