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이순신을 존경했던 임진왜란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23. 11. 18.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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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을 존경했던 임진왜란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 그는 누구인가?

임진왜란은 단순히 조선과 왜의 전쟁이 아니었다. 명나라 역시 조선에 많은 원군을 보냈는데 이때 온 장수중 특히나 우리에게 기억이 남는 인물이 바로 수군 도독 진린이다. 그는 이순신 장군과도 우애를 다졌다고 하며, 또 그의 후손 광동진씨는 지금 우리나라에도 많이 살 정도로 우리와는 친숙한 인물이다.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 그는 과연 누구일까?

1. 임진왜란에 참가한 진린

영화 노량에서 진린 역을 맡은 정재영

 

진린은 1543년 지금의 중국 광둥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명나라 장군으로서 도적과 당시 명의 남방 평정에도 공을 세운 장군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지 명나라는 진린을 부총병으로 임명하여 조선을 돕게한다. 이때만해도 별다른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진린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바로 왜군이 다시 조선을 침략한 1597년 정유재란때이다. 이때 명나라는 왜군과의 강화를 시도했지만 결렬되자 조명연합군이 네 방향으로 나뉘어 왜군을 몰아내겠다는 사로병진책을 준비한다. 

여기에 진린이 속한 수군은 서해를 돌아 남해로 이순신 장군의 함대와 만나게 된다. 1598년 7월 진린은 명나라 400척에 병력 5천을 태워 지금의 고금도진에 도착했다. 당시 진린은 수군 도독으로 조선의 제독이었던 이순신 장군보다는 한단계 낮았지만 명나라 자체가 당시 조선을 구원해주러온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은 명나라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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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순신의 벗이었던 류성룡<징비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진린을 표현하고 있다. 
"진린은 성질이 포악하고 교만하며 자신의 병졸들이 조선 수령을 구타하고 모욕 주는 것을 가만히 보기만 했고, 늦게 도착한 조선신하를 피투성이가 되도록 때리기도 했다.:" 이에 이순신 장군과는 도저히 의견이 맞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이러한 진린의 성격을 미리 파악하고 진린에게 예를 갖춰 대한다. <난중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진린이 온다는 소식에 술과 음식을 차려 대접하고 멀리 마중나가 군의를 갖추어 맞이했다. 이에 진린 등 명나라 장수들이 이순신 장군을 과연 훌륭한 장수라 칭했다."

2. 이순신 장군에게 감복한 진린

불멸의 이순신 진린

 

진린이 고금도진에 도착한지 이틀 뒤, 이순신 장군과 해역을 살펴보던 진린은 노략질 하는 왜군을 발견한다. 이때 왜군 30여척과 조선수군이 전투를 벌였는데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군은 멀찍이 떨어져 보기만 하고 있었다. 전투를 승리로 이끈 조선 수군 장군 송여종이 이순신 장군에게 승전보를 올렸는데 진린은 자신의 병사들은 지켜보기만 했다는데, 분노를 참지 못한다.

이에 이순신 장군은 조선 수군이 세운 전공을 모두 진린에게 돌리며 왜군의 머리를 모두 진린에게 주고 명나라 황제에게 이 승전보를 알리라고 한다. 그제야 진린은 이순신 장군의 명성이 맞다며 극찬을 한다. 이순신 장군이 제대로 진린의 마음을 빼앗은 것이다. 

이러한 일도 있었다. 진린의 명나라 군대는 자신들의 힘만 믿고 조선 백성들을 무시하고 못살게 굴고 술에 취해 물건을 약탈하거나 여자들을 건드렸다. 이에 이순신 장군은 조선 수군의 군막을 모두 걷고 전선을 물리도록 했다. 갑작스러운 이순신 장군의 반응에 진린이 깜짝 놀라 물으니 이순신 장군이 이렇게 말했다. 

"조선군과 백성들은 명나라에서 보내준 병사들을 의지하고 있는데 오히려 괴롭히니 백성들과 군사들이 도망가고 있다. 이에 저 역시 다른 섬으로 옮기고자 한다."

그제야 진린은 이순신 장군에게 사과 하고 자신의 군사들을 이순신장군이 처벌할 수 있는 권리를 주니 그제서야 명나라 군대가 사고를 안치고 잠잠히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을 겪고 진린은 이순신 장군에게 이야, 노야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야'는 어른을 높여 부를 때 최고 존칭어였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은 명실상부 명나라 수군까지 명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진린의 신임을 얻게 된다. 

 

이순신 장군의 지휘력과 인성을 본 진린은 '이순신을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나라를 구한 보천욕일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라며 극찬을 했으며, 명나라에 가서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권하기도 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진린은 이순신 장군을 존경해 마지 않았다. 

3. 노량해전에서 진린의 모습

 

임진왜란의 최후 전투였던 노량해전이 벌어질 때, 명나라의 기조가 이미 피해를 최소화하길 원했던지라 왜군의 퇴각을 허용 해주는 것으로 기울었으나 진린은 이순신장군과 함께 마지막 노량해전에 참가한다. 이순신 장군은 저항하며 도망치는 왜군을 몰살시키기 위해 포격적이 아닌 전면전을 시작하였고,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이 포위되자 이순신 장군이 이를 구원하다가 전사하게 된다. 

노량해전에서 살아남은 왜군은 거의 없을 정도로 조명연합군의 대승을 거두고 진린은 기뻐 이순신 장군에게 갔으나 이미 전사한 뒤였다. 이를 본 진린은 '어른께서 나를 구해준 것으로 알았는데, 이 무슨 일이십니까' 라고 땅에 주저앉아 통곡했다고 전한다. 이를 본 명나라 수군 장수와 병사들도 함께 이순신 장군의 죽음에 눈물을 흘렸다. 

4. 진린의 후손, 우리나라 광동 진씨가 되다

 

진린은 정유재란이 끝나고 명으로 돌아가 그 공적을 인정 받았으며, 1605년 명나라 묘족을 토벌하는데 공적을 세우고 1607년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이후 명나라가 청나라에 의해 멸망할 때 진린의 아들이었던 진구경은 청과 끝까지 싸우다 죽었고 그 아들 진조는 난징 해안에서 배를 타고 조선으로 떠난다. 다시 말해 진린의 손자가 조선으로 넘어 온 것이다. 

이후 지금의 경남 거제 장승포에 도착한 진조는 다시 진린이 있었던 고금도로 와 정착하였고 그 아들이 해남으로 이주해와 마을을 만들었다. 조선에 정착한 진린의 후손들은 광동 진씨 가문을 만들었고 지금의 해남군 황조마을은 중국 황제의 조정에 공을 세운 집안이다라는 뜻이기도 하다. 

 

지금도 우리나라와 중국에 있는 진린의 후손들은 서로 교류를 하며 지내고 있고 이순신 장군의 덕수 이씨와도 교류를 이어나가며 선조의 우애를 다지고 있다.

5. 진린의 평가 

 

우리나라의 임진왜란을 주제로 다룬 많은 드라마와 영화 그리고 책에서는 진린을 형편없고 거만한 장수로만 묘사하고 있다. 물론 역사의 기록에서도 진린의 평가중 그런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순신 장군과 지내면서 그에 대한 신의가 생긴 이후로는 그런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내용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는데, 바로 <선조실록>이다. 

선조가 당시 좌의정 이항복에게 '진린은 어떤 장군인가?'라고 묻자 이항복은 '명장입니다'라고 대답했으며, 노량해전 이후 왜군이 보관해 둔 수만 석의 곡식을 조선에게 그대로 넘겨주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또한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루기도 했다. 또한 진린은 명나라 황제와 선조에게 이순신 장군의 공을 소상히 알렸으며 이에 명나라 황제는 이순신 장군에게 도독 직함과 명조팔사품이라는 하사품을 전달하기도 했다. 

진린이 나쁘게 묘사되는 것은 사실 선조와 당시 서인들이 이순신 장군의 공을 인정하는데 인색하였고, 자신들이 하늘에서 내려준 병사들이라 부르며 찬양했던 진린과 명나라 군대가 이순신 장군을 찬양하자 진린 자체를 깎아내리며 이순신 장군의 평가를 무의미하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진린을 나쁘게 평가했다는 설도 있다.


진린을 명장이다 혹은 형편없는 인물이다라고 평가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진린은 이순신 장군의 인품과 그의 장군으로서의 능력을 극찬하였고 신의를 가졌으며, 함께했던 장군임에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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