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천재 신숙주 왜 배신을 선택했나? 숙주나물의 유래
여기 한 시대를 풍미한 천재가 있다. 우리 역사속에 등장하는 천재들 중에서도 단연 손꼽힐만한 인물, 하지만 후대에 배신자 혹은 변절자라 불리며 한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숙주나물의 유래가 되어버린 인물. 바로 그는 신숙주이다. 그는 왜 천재라 불리며 배신자가 된 것일까? 그 생애에 대하여 알아보자
1. 신숙주의 어릴 적 생애와 성장기
신숙주는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관료였던지라 7세가 될 무렵 한성에 올라온다. 신숙주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이미 그 주위에서는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이라 평이 자자했다. 여기에 성격도 침착하고 항상 깊이 생각하면서 말하는 스타일이었으며 글재주 역시 뛰어났다.
1438년(세종 20) 그의 나이 불과 21세에 생원시로 입격하여 생원이 되고 진사시까지 모두 합격하였고 초시, 복시 등에서도 모두 장원 즉 1등을 해버린다. 여기에 다음해에는 친시문과 급제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오른다. 요즘시대로 말하면 그냥 모든 시험을 1등으로 해버리고 행정고시도 우습게 통과 한 것.
신숙주의 일화 -1 그가 1등으로 장원급제를 해서 벼슬길에 오르자 조정에서는 그를 성균관 문묘에 제례를 올릴 때 책임자 개념으로 임명했다. 그런데, 이때 어떤 늙은 서리가 깜빡하고 첩지를 전달하지 않았고 사헌부에서는 가차없이 탄핵한다. 그러나 신숙주는 서리에게는 자녀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본인이 거짓 자복하여 대신 징계를 받았다. 뒤에 이 사실을 알게된 세종은 그를 특별히 용서해주었다. |
그는 집현전으로 들어간 뒤 그야말로 책에 묻혀 살았고 자청하며 숙직을 하면서 책만 읽었다. 덕분에 모든 고전과 역사 지식이 당대에 이길자가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열정 때문에 어렸을적부터 책을 좋아하던 세종도 기특하게 여겼다.
신숙주의 일화 -2 신숙주가 하루는 책을 읽다가 책상에서 잠이 들고마는데 세종대왕이 우연히 집현전을 들렸다 이를 발견하고 자신의 옷과 포의, 이불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새벽에 잠을 자다 일어난 신숙주가 자신의 몸에 용포가 둘러 있는 것을 보고 감동했다고 전한다. 이 이야기는 세종대왕의 위인전에서 유독 많이 나오는 이야기지만 사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신숙주다. |
2. 신숙주의 엄청난 벼슬생활
-외교관으로써 신숙주
1442년(세종 24) 그는 일본의 통신사로 보내지게 되는데, 이때 조정에서 글 잘하는 선비를 뽑는 것에 있어 당당하기 신숙주가 뽑혔다. 그는 사실 언어에도 능해서 중국어, 일본어, 여진어, 몽골어, 유구어 등 당시 동아시아의 모든 언어를 잘했다. (거의 사기적인 스펙의 소유자)
그는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건너가서 조선의 학문과 문화를 알리고 한자, 유학 등을 가르쳤다. 당시 모든 일본인들이 신숙주를 보고 몰려들어 시 한편 써달라고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 일본에 다녀와서 일본견문록은 물론 일본의 인명과 지명 등을 그대로 한자로 기록으로 남겼다. 또한 돌아오는 길에는 대마도에 들려 무역협정까지 체결하는 등 외교관으로서도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한글 창제 작업에 착수한 신숙주
1443년 이후부터는 곧바로 세종의 명을 받아 우리 한글을 만드는데 착수한다. 신숙주는 당시 죄를 지어 만주 요동으로 귀양와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을 찾아가 음운과 어휘에 대한 부분을 의논 하였는데, 황찬이 놀랄 정도로 신숙주의 총명함과 이해력이 대단했다고 전한다.
그는 세종대왕이 기획한 훈민정음에 대한 애정이 깊었으며 훈민정음의 해설서 집필에도 참여하였고 1446년 다른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훈민정음해례본 편찬까지 완료 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대최고 화가 안견이 몽유도원도를 그리자 찬시를 써서 헌정하였고 문종의 대리청정에도 참여하는 등 그 능력을 인정 받았다.
이에 그의 벼슬도 지속적으로 올라가서 세종의 최측근이 되었다.
신숙주의 일화 -3 명나라에서 온 사신 예겸이란자가 조선에 당도하였는데 많은 조선의 대신들이 예겸에게 시문을 주고 받다가 망신을 당하고 만다. 이때 신숙주가 가장 친한 성삼문과 함께 세종의 명을 받아 예문을 상대하게 되었고, 예겸은 이 둘을 동방거벽(동방에서 가장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찬사하였다. |
3. 신숙주 역사의 갈림길에서
세종대왕은 변환이 깊어지자 자신과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신숙주를 포함한 집현전 학사들을 불러 훗날 단종의 앞날을 잘 지켜달라고 말한다.
그러던 와중, 평소 인간관계가 넓었던 신숙주는 세조의 최측근이자 당시 개국공신의 손자였지만 낮은 직위에 있던 한명회, 불우한 처지였지만 야심이 있었던 권람과도 친하였다. 문종이 죽고 단종이 즉위하자, 숙부였던 수양대군은 명나라의 고명에 답하기 위한 사신으로 가고자 했는데 이때 한명회와 권람이 조언을 하며 신숙주가 서장관으로 수양대군을 보필하게 된다.
이 만남을 계기로 수양대군은 신숙주의 능력을 아끼기 시작했고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이후 숙부인 세조가 자신의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는 계유정난 당시, 신숙주의 행적은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다만 간접적인 지원의 형태로 계유정난에는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세조가 왕위에 오르면서부터 신숙주는 그야말로 탄탄대로를 달리기 때문이다. 그는 도승지 위치에 있으면서 단종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관찰하고 세조에게 보고 하였다. 또한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명나라에 가서 책봉의 고명을 받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단종 복위를 꾀하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들과 거리를 두었으며, 사육신의 단종 복위 계획이 발각되어 참살을 당할 때도 도와주지 않았다. 여기에 오히려 다른 신하들과 함께 단종의 서인 강등을 건의하였고 심지어 목숨까지 거두어야 된다고 말한다. (사육신은 실제로 신숙주를 가장 먼저 척살해야 할 대상으로 올려놓기도 했다.)
-세조대에 공을 세우다
1456년(세조2)에는 병조판서는 물론 예조까지 맡아서 조정의 일을 관장했다. 이후 농업과 목축에 대한 농산축목서를 편찬하기도 하고 북방 오랑캐들이 국경을 어지럽히자 세조에게 군사를 일으킬 것을 건의하기도 한다.
1458년에는 우의정자리에 올랐고 예조까지 겸하면서 명나라, 일본 관계까지 신경썼는데, 업적으로만 따지면 당시 조선초 내노라 하는 명재상들보다 훨씬 우위에 있는 역할들을 해낸 것이다.
1460년에는 심지어 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2차례에 걸쳐 동북방면을 어지럽히는 여진족을 소탕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남해안을 약탈하는 왜구도 토벌하고 해안가에 성곽 건축과 화포 등을 설치하는 등 수많은 공적을 세우기도 한다.
1468년 세조가 죽음을 앞두고 신숙주를 보고 칭하길 '당태종에게는 위징이 있었으면 나에게는 신숙주가 있구나'라고 말할 정도이다. 세조를 왕위에 올린 공신들도 많지만 유독 신숙주를 아꼈다는 것을 입증하는 말이기도 하다.
4. 예종대에 남이 장군을 죽이는데 앞장서다
세조가 죽고 그 아들 예종이 어려서 즉위하자 실권은 한명회와 같은 공신과 신숙주 등이 잡는다. 신숙주는 예종 즉위 후, 당시 최연소 병조판서 자리에 올랐던 남이 장군을 간신 유자광과 함께 심문한 뒤 숙청하고 이 공을 인정 받아 공신의 자리에 오르기도 한다.
1469년 예종이 재위 1년만에 급사하자 신숙주는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을 왕위에 올리도록 추천했고 자을산군이 왕위에 오르니 익가 바로 성종이다. 성종 즉위 후에도 신숙주는 외교 업무를 주로 담당하였고 사람들은 외교의 달인이라 신숙주를 극찬했다. 이후 영의정 자리에 다시 한 번 오른다.
신숙주는 자신이 비록 공신의 자리에 있었으나 한명회 등의 공신이나 훈구파의 세력이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고 사치스럽게 행동하지 않고 위세를 부리지 않았으며 겸손하게 처신했다고 한다.
1474년 병을 이유로 사직을 하겠다는 상소를 올리지만 성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1475년에도 병으로 사직을 청했지만 왕이 허락치 않아 영의정을 계속한다. 이후 1475년 그의 나이 58세에 건강이 안좋아지며 임종 직전에 이르렀고 이때 문병을 온 성종이 조언을 묻자 신숙주는 '일본과의 화친 관계를 잃지 마소서'라고 유언하였다.
신숙주는 지금의 경기도 양주에 부인 무송윤씨와 묻혀 있다.
많은 시와 작품을 남겼지만 후에 사림파에 의해 변절자, 배신자로 불리며 사라졌고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많이 소각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럼에도 현재 보한재집, 농산축목서, 해동제국기 등이 전하고 있다.
5. 숙주나물의 유래
옛부터 쉬기 쉬운 숙주나물을 당시 조선의 백성들이 보기에 왕을 배신한 신숙주와 비슷하다 하여 녹두나물에 '숙주'를 붙여 숙주 나물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는 확실치는 않다. 숙주라는 이름이 기록상으로 아무리 빨라도 19세기에나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신숙주의 후손들 고령신씨들은 숙주나물을 녹두나물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제사상에 숙주나물은 올리지 않는다고 전한다.
조선 역사 중에서 사실상 신숙주처럼 자신의 능력을 전부 발휘했던 신하도 드물다. 천재로 조정에 들어와서 정치, 외교, 군사, 경제까지 모든 분야에 있어서 공을 만들었으며 조선초기의 기틀을 닦는데 힘을 썼던 그야말로 천재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후대에 숙주나물이라 조롱 당하며 그의 이름이 불리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당시 신숙주의 능력과 인품에 반했던 사람들의 배신감이 더욱 컸기 때문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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