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안타깝다! 조선을 뒤바꿀 수 있었던 소현세자 죽음이 독살인 이유는?

윤여시 2024. 2. 13.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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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다! 역사를 뒤바꿀 수 있었던 소현세자 죽음이 독살인 이유는?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조선 후기 역사중에서 '만약'이 가장 아쉬운 인물이 있다. 바로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가 그 주인공이다. 못난 왕이자 아버지였던 인조 때문에 그 꽃을 피우지 못한 인물... 소현세자의 죽음이 더 안타까운 것은 역사적으로도 그 죽음이 석연치 않기 때문이다. 조선의 여러 독살설 중에서도 가장 신빙성 있는 독살설중 하나인 소현세자의 죽음 과연 어떤 내용일까? 추적해보자 

 

 

안타깝고 비극적인 이야기 소현세자 그는 누구인가?

안타깝고 비극적인 이야기 소현세자 그는 누구인가? 조선 역사에 있어서 가장 비극적이고 치욕적이었던 사건 병자호란... 그리고 그 속에 청나라 볼모로 끌려가야 했던 비극적인 두 형제가 있다

yoosi0211.tistory.com

영화 올빼미<소현세자>
영화 올빼미<소현세자>

1.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볼모로 떠나다 

먼저 소현세자의 독살설에 대해 알기 전에 그 배경부터 하나하나 살펴봐야 한다. 인조가 왕위에 올랐을 무렵 이미 북방의 만주족은 강성해질대로 강성해져 그 이름을 청나라 했으며 자신들에게 항복하지 않고 망해가는 명나라와 동맹을 맺고 있는 조선을 쳐들어온다. 이른바 병자호란이다.  

 

그리고 마침내 인조15년(1673년) 1월 30일 매서운 바람이 불던 겨울, 인조와 신하들은 청나라에 항복을 요청하며 최후의 보루였던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청나라 태종에게 향했다.

 

산성에서 내려온 인조는 지금의 송파구인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하는 치욕을 겪게 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삼전도의 치욕이다.    

 

항복을 선언한 패전국에게는 가혹한 승전국의 요구가 있었다. 청나라는 항복의 조건으로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 부부를 비롯하여 차남 봉림대군까지 인질로 삼아 청나라로 데려가겠다고 한다. 이에 많은 신하들이 반대를 했으나 소현세자는 나라를 위해 본인이 나서 청나라로 향하겠다고 하였고, 2월 8일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봉림대군은 청으로 향한다. 이때 소현세자의 나이 스물 여섯, 봉림대군은 열아홉이었다. 

2. 소현세자 청나라에서 조선의 미래를 보다 

소현세자는 지금의 중국 심양에서 머물며 청나라와 조선의 외교적인 일들을 하나하나 해결해나간다. 당시 청나라와 명나라는 전쟁중이었던터라 청나라의 조선 파병 요청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조선의 입장에서 지혜롭게 청나라와의 충돌을 막아내었다. 비록 볼모로 잡혀왔지만 요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주중대사격의 일을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소현세자는 당시 썩어빠진 양반들의 유교사상과 아무 쓸데 없는 학문이 나라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부강한 나라의 힘만이 조선을 굳건히 세우는 길이라 믿기 시작했다. 또한 이미 소현세자는 청나라로 오기전부터 망원경, 화포, 자명종 등 당시 중국에 들어와 있던 서양문물에 대하여 깊은 관심이 있었는데, 심양에 와서 더욱더 그 과학기술 등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또한 소현세자는 조선이 그렇게 외교적 감각 없이 떠받들던 명나라가 처참하게 몰락하고 청나라에 항복하는 것을 두눈으로 볼 수 있었고, 당시 명나라의 의리를 울부짖으며 맺었던 외교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임을 깨닫는다. 소현세자는 그렇게 한 나라의 군주로서 진화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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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소현세자 유럽 선교사 '아담샬'을 만나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북경에 입성하자 소현세자 역시 북경에서 머물렀다. 그런데, 이때 소현세자의 인생을 바꿀 인물을 만나게 되니 바로 예수회 선교사 아담샬이다.

 

소현세자는 아담샬을 자주찾아 서양의 문물을 배우고 천문, 과학, 천주교의 교리 등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누었는데 서구의 과학 문물은 물론 천주교의 교리까지 받아들이겠다며 아담샬이 오히려 놀랄 정도로 개혁적인 꿈을 꾸기 시작한다. 

 

이때가 1644년으로 조선이 일본의 무력에 의해(강화도조약) 개항하기 232년전이자, 일본이 미국의 페리제독에게 개항하여 메이지유신을 단행하기 전 211년전의 일이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의 역사가 바뀔 수 있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소현세자
영화 올빼미에서 인조와 소현세자

3. 찌질한 아버지 인조.. 소현세자를 질투하기 시작하다 

다시 소현세자가 볼모로 잡혀온지 3년째 되던 인조 18년, 인조가 병이나 건강이 안좋아지자 조선은 소현세자의 일시적인 귀국을 요청한다. 청 황제 태종은 직접 소현세자의 송별연을 열어주었는데, 소현세자가 태종을 만나기 전, 조선 침략의 선봉장이었던 용골대가 세자에게 안장을 한 말과 대홍망룡의(국왕의 옷)를 입혀주려 하였다. 그러자 세자는 깜짝 놀라 이를 사양하고 입지 않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세자의 빈객 신득연이라는 자가 이를 소상히 써 인조에게 보고하였고 인조는 청나라의 신임을 얻고 있는 소현세자가 자신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소현세자를 싫어하기 시작한다. 소현세자가 조선에 와 인조를 볼때도, 그리고 다시 청나라로 돌아가 조선의 외교를 도맡아 할 때도 인조는 세자의 수많은 노력을 무시하고 점차 신뢰하지 않기 시작한다. 

 

심지어는 청나라가 세자를 귀국시키려 하자 인조는 오히려 이를 의심하며 세자의 귀국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다. 그리고는 세자를 향한 청나라에게 오히려 의혹을 제기한다. 한 번은 소현세자의 아내 세자빈 강씨가 볼모생활 중 부친이 사망하는일이 발생하자 소현세자와 세자빈은 일시적으로 귀국을 하였는데 인조가 끝까지 세자빈이 빈소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청나라로 돌아가는 일까지 발생했다. 

4. 소현세자의 귀국 그리고 갑작스러운 죽음

청나라가 명나라를 무너트린 1644년 마침내 소현세자는 조선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러나 이미 인조는 의심병이 심각한 상태로 소현세자를 왕위를 위협하는 존재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현세자는 인조의 찌질한 생각은 상상도 하지 못한채,  오직 자신이 청나라에서 배운 조선의 개혁과 발전 그리고 서양의 과학을 받아들이겠다는 부푼 꿈을 갖고 서양의 진귀한 물품과 과학 서적을 갖고 인조에게 인사를 올린다.

인조는 돌아온 세자에게 분노를 표시하고 아들로써 대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무시하였고 못살게 굴었다. 그리고 소현세자는 귀국 한지, 두달만에 병을 얻어 자리에 눕는다. 이때 그의 병명은 학질이었다. 하지만 당시 34세의 나이였던 소현세자에게 학질은 무서운 질병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때 학질을 치료하기 위해 등장하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어의 이형익이다. 그는 소현세자의 독살설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로 그가 열을 내리게 한다며 소현세자에게 침을 놓았는데, 침을 맞은 세자는 3일 만에 세상을 떠난다.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5. 소현세자의 죽음이 독살인 증거

- 인조의 후궁 소용조씨가 추천한 '의관 이형익' 

소현세자의 치료를 담당하던 어의 이형익은 인조의 후궁 소용 조씨 사가에 출입하던 의원이었고 소용 조씨의 추천으로 어의가 된 자였다. 그가 어의가 된 것은 불과 3개월 밖에 되지 않았다. 그가 어의가 된 시점은 세자의 귀국 시점과 비슷하고, 그를 추천한 소용조씨는 당시 소현세자와 세자빈에게 알력 관계에 있었으며 특히 세자빈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여기에 자신의 아들이 어이 없게 죽었는데 인조는 이형익을 옹호하는데, 죄가 없을지라도 왕족을 지키지 못하면 벌을 받는게 당시 어의의 운명이었는데 세자를 죽여 놓고 그 아버지가 옹호한다는 점은 상식밖의 일이다. 

 

모든 신하들이 나서서 이형익을 처형하라고 했는데, 인조는 끝까지 이형익을 옹호한다. 심지어 이형익을 비판하는 신하들을 좌천시키거나 부당한 명령을 내려 멀리 떠나 보내기도 한다. 

- 인조실록에 기록된 소현세자 시신의 상태 

인조실록 23년 6월 27일 기록에는 세자가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다" 라고 표현될 정도로 소현세자의 상태는 독살에 가까웠다. 세자의 시신은 까맣게 변했고 눈,코,귀 등에서 피가 나오는 것은 독약을 먹고 죽은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소현세자 시신의 모습을 본 어머니 인열왕후의 서제였던 진원군 이세원의 아내가 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다가 이 같은 말을 한 기록도 있다. 

- 소현세자의 장례 절차

인조는 세자의 장례에도 억지를 부린다. 세자의 관에 임금의 관을 뜻하는 재궁이라는 호칭을 쓰지 못하게 하고 무덤에도 원자 대신 묘자를 쓰도록 했다. 상복 착용 기간 역시 예법과는 반대로 3년이 아닌 1년으로 정했으며, 이마저도 마땅치 않은지 7일 만에 상을 마친다. 

 

많은 신하들이 부당하다고 비판하였으나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소현세자의 장례절차를 마무리 해버린다. 

- 소현세자의 후사 문제와 강빈의 죽음

세자가 죽었을 때 아들이 장성하였다면 본래 세자의 자리를 잇게 된다. 여기서 소현세자의 아들 원손으로 불리는 석철이 있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도 소현세자의 아들 석철을 그 다음 세자자리에 올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조는 원손이 미약하다는 이유로 신하들에게 노골적으로 다음 세자자리를 주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법과 원칙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태자가 없으면 태손이 왕위를 잇게 했다는 법을 잊은 행동이었다. 온갖 조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인조는 끝까지 원손을 세자로 올리지 않았으며 원손을 폐하고 차남 봉림대군에게 세자자리를 물려준다. 

 

이후 인조는 더나아가 세자빈 강씨에게 화살을 돌린다. 세자가 죽었음에도 강빈이 청나라와 결탁해 원손을 왕위에 올릴지 모르는 의심병 때문이었다. 인조 23년 8월, 원손이 폐립된지 약 두달 후 궁중에서 저주사건이 발생하여 2명의 궁녀가 하옥된다. 이때 한 명이 원손의 보모 최상궁이었다. 인조는 이들을 고문하여 배후에 강빈을 잡으려 했으나 2명의 궁녀는 조작된 혐의를 시인하지 않고 죽음을 택한다. 

 

그러자 인조는 강빈의 처가에 화살을 돌려 오라비를 귀양 보내고 저주 사건을 또다시 일으켰지만 이 역시 통하지 않는다. 인조24년, 인조의 수라상에 독이 든 전복구이가 오른 사건이 발생하는데 인조는 강빈에게 혐의를 돌려 후원 별당에 감금한다. 그리고는 아예 강빈이 역모를 품었다는 명을 내려 폐출하고 사약을 내린다.

 

강빈이 죽고 인조는 더나아가 그 형제들을 모조리 죽였으며 이전의 저주사건을 다시 끌고와 궁녀들을 고문하여 강빈의 이름이 나오게 하였고 강빈의 친정어머니를 죽이고 자신의 손자들인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 보낸다. 그리고 석철은 그 다음해 12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야말로 쓰레기 같은 왕 인조가 만들어낸 비극이었다.


소현세자가 죽은 것은 조선의 미래의 좌절을 뜻했다. 만약에 소현세자가 모자른 왕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면 조선은 서양의 문물을 일본보다 훨씬 빨리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인조는 독살이 아닐지라도 소현세자를 비롯하여 그의 후손들을 멸족시키면서 그곳에 실리 없는 성리학과 사대주의를 가득 채워버렸다. 그리고 조선은 점차 몰락해간다. 이것이 모자른 왕 인조가 만들어낸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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