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죽인 이유는? 소현세자의 부인 세자빈 강씨
권력 앞에서는 부모도 자식도 형제도 없다지만, 시아버지가 모든 힘을 다 잃어버린 며느리를 죽인 사건은 아마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흔치 않은 일일 것이다. 이것을 바로 찌질한 왕 인조가 자신의 아들 소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에도 모자라 자신의 며느리 세자빈 강씨를 죽임으로 해내었다. 소현세자의 부인 세자빈 강씨 그녀는 왜 죽어야만 했을까?
1. 세자빈 강씨 궁에 들어오다..
세자빈 강씨는 광해군대에 우의정을 지낸 강석기의 딸이었다. 강석기는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반정을 일으킨 공신 세력과 같은 서인이어서 친분이 있었다. 강석기는 소현세자의 스승으로서도 역할을 하기도 했었으며 왕실과 어느정도 인연이 있던 인물이었다.
여튼 1627년 12월, 강석기의 딸은 소현세자와 혼인을 올리니 이때부터 세자빈 강씨가 되었다. 당시 17살의 나이였던 세자빈 강씨는 소현세자보다 한 살이 많은 연상연하 커플이었다. 하지만 세자빈 강씨의 궁궐 생활은 이미 순탄치가 않았다. 사실 세자빈 강씨와 소현세자가 혼인을 한 1627년 1월에는 이미 후금이 조선과의 형제의 관계를 요구하며 쳐들어온 정묘호란이 있었기 때문에 나라는 뒤숭숭하고 궁의 분위기 역시 좋지 않았다.
- 소현세자와의 신혼 생활
궁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지만 세자빈 강씨와 소현세자는 나름 궁합이 잘 맞는 신혼부부였나보다 많은 기록이 있지는 않지만 세자빈 강씨는 결혼하고나서부터 병자호란 전까지 약 10년이 안되는 기간 동안 1남 2녀를 낳았는데, 2녀를 먼저 낳고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1년전에는 드디어 원손을 낳으며 나름 당시의 국모로서 기반을 다졌다.
만약 병자호란이 없이 그대로 세월이 흘렀으면 무난하게 왕비가 될 수 있는 순리였지만 역사는 그녀를 가만히 두질 않았다.
2.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청나라에 인질로 가다
마침내 1636년 12월 후금에서 청으로 국호를 바꾼 청 태종은 조선을 다시 한 번 침략한다. 이른바 병자호란이다. 세자빈 강씨는 자신의 아들과 함께 먼저 강화도로 피신하였지만 1637년 1월 22일 강화도가 함락해버렸고, 강화도로 도망오려다 못오고 남한산성에서 꾸역꾸역 버틴 인조마저도 청 태종에게 절을 올리는 항복을 하게 된다.
이때 청나라는 항복의 조건으로 소현세자와 그 아우 봉림대군 두 왕자를 청나라 수도로 볼모로 잡아가겠다는 조건을 걸었고 세자빈 강씨 역시 소현세자를 따라 인질로 청나라를 가게 되었다.
- 청나라에서의 생활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는 중국의 심양에 머물었으며 청나라 황제가 세자를 위해 지어준 심양관에서 생활을 하였으며 이곳에서 봉림대군 부부와 함께 지낸다. 소현세자는 이곳에서 조선에서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과 함께 땅을 경작하고 무역을 하기도 하였으며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를 조율하는 외교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소현세자와 세자빈은 이곳에서 청나라에 모여든 서양 문물의 발전상을 보았고 외국인 선교사 아담샬을 통해 외국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조선의 발전을 만들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이곳에서 조선을 발전시킬 원대한 포부를 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1644년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가 소현세자의 조선 귀국을 허락하면서 두 부부는 길다면 긴 8년만의 인질 생활을 끝내고 조선을 향한다. 그러나 반갑게 맞아줄줄 알았던 인조는 소현세자 부부를 싸늘하게 대하기 시작한다.
3. 인조 소현세자를 죽이다?
인조는 장성한 소현세자가 청나라를 등에 업고 자신을 왕위에서 내쫓을까봐 두려웠다. 자신 역시 쿠데타로 집권을 했기 대문에 소현세자 역시 위협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돌아오자마자 분노를 숨기지 않았고 싸늘하게 대했다. 이때문일까 소현세자는 1645년 4월 귀국한지 불과 두달만에 사망한다. 조선왕족실록에서조차 독살이 의심된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였다. 아마 생각하건데 조선의 독살 의심 사건 중 소현세자의 독살이 가장 사실에 부합할 것이다.
여튼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인조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동생 봉림대군을 세자로 지명하면서 세자빈 강씨 역시 세자빈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한편 역사에 의하면 인조는 자신의 며느리인 세자빈 강씨 역시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기록에 따르면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인조가 말하길, 강빈이 심양에 있을 때 은밀히 왕위를 바꾸려고 도모하면서 미리 왕비 복장을 만들어 놓고 내전의 칭호를 외람되이 사용하였으며 분한 마음으로 시끄럽게 성을내고 문안하는 예까지도 폐한지가 이미 여러날이 되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흉한 물건을 파묻고 독을 넣은 것은 모두 다른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 하루도 목숨을 부지하게 할 수 없으니 해당 부서로 율문을 상고해 품의 하여 처리하게 하라 <인조실록> 1646년(인조 24) |
- 세자빈 강씨 인조에게 저항하다
보통 왕위를 계승함에 있어 자신의 장자가 죽을 경우 뒤를 이어 손자가 세자의 자리에 올라야 했으나 인조는 기다렸다는 듯이 차남 봉림대군을 세자의 자리에 올린다. 이후 소현세자의 남은 아들들마저 왕위 논란에서 없애기 위해 세자빈 강씨에게 없는 죄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에 앞장선 것이 바로 당시 인조의 후궁이었던 악녀 소용 조씨다. 소현세자가 죽은 후 누군가 소용조씨를 저주하는 인형을 묻은 사건이 발생한다. 누가봐도 아무 증거가 없음에도 인조는 세자빈 강씨를 모시는 궁녀들을 붙잡아 고문하였으나 궁녀들은 자신들이 죽을지언정 절대 세자빈 강씨는 그런일이 없다고 하면서 죽음을 맞이 한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세자빈 강씨는 자신의 남편이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고 자신의 아들 역시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자신을 둘러싼 억울한 일들이 발생하자 참지 못하고 인조는 물론 소용조씨에게 맞서 저항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세자빈 오라비들인 강문성과 강문명까지 곤장을 맞고 죽임을 당하면서 세자빈 강씨는 인조의 침실로 달려가 울며불며 통곡하였고 맏며느리로서 드려야 하는 조석문안도 중지하였다.
이에 인조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강씨를 유폐시켜 나오지 못하게 하였다.
- 세자빈 강씨 억울한 누명을 입다
이제 인조와 세자빈 강씨는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가 아닌 원수였다. 갈등의 골이 깊어졌던 1646년 1월, 인조의 수라상에 오른 전복구이에서 독이 발견된다. 이에 인조는 기다렸다는 듯이 강빈의 나인 다섯 명과 수라간 나인을 문초한 끝에 이것이 세자빈 강씨가 시켰다는 진술을 받아낸다. 그 외에 증거는 없었다.
이에 인조는 마침내 2개월 후인 1646년 3월 세자빈 강씨에게 사약을 내린다. 모든 신하들이 아들 소현세자마자 억울하게 죽은 것을 알고 소현세자의 이름을 할며 이를 반대하였으나 인조는 다음과 같이 미친 분노를 표출한다. 어찌 한 나라의 왕이 이렇게 찌질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어찌 개 같은 것을 억지로 임금의 자식이라고 하는가? 이것이 나에 대한 모욕인가? - 1646년 인조 24년 |
세간에는 이미 세자빈 강씨와 사이가 안좋은 소용 조씨가 이 사건을 꾸몄고 인조가 알면서도 모른 척을 해주었다는 이야기가 가득할 정도로 세자빈 강씨의 죽음은 당시에도 어마어마한 충격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세자빈 강씨에 죽음을 그녀의 강한 성격 때문이라고 하며 기록하고 있다.
소현세자빈을 폐출하여 옛날 집에서 사사하고, 하사한 교명이나 장복을 불태웠다. 의금부 도사 오이규가 덮개가 있는 검은 가마로 소현 세자빈 강씨를 싣고 선인문을 통해 나가니 이를 본 남녀노소가 한탄하였다. 강씨는 성격이 거셌는데, 끝내 불순한 행실로 임금의 상의 뜻을 거슬려 오다가 드디어 사사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의 죄악이 밝혀지지 않았는데 추측만으로 법을 집행했기 때문에 민심이 이를 수긍하지 않고 소용조씨에게 죄를 돌렸다. -1646년 인조 24년 3월 |
한편 그녀와 소현세자의 자식들도 제주도로 유배되어 그 곳의 풍토병으로 생을 마감하니 그야말로 한 일가가 억울하게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다 할 수 있겠다.
또한 세자빈 강씨가 죽으면서 자신의 복수를 부탁한다는 말을 했다는 구실로 인조는 소현세자빈 강씨의 집안 마저도 모두 절단내놨다. 무엇보다 강씨의 어머니를 사사시키는 한편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 강석기의 무덤마저 파헤쳐 부관참시한다. 조선에서 가장 인기 없는 모질이 왕 인조의 진가가 드러난 것이다.
4. 세자빈 강씨의 복권
인조가 죽고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억울하게 죽은 세자빈 강씨의 복권 문제가 떠오른다. 그러나 효종의 입장에서 차남이었던 자신의 왕위에 대한 정통성 문제가 있기 때문에 세자빈 강씨의 복권을 말하는 자는 역적으로 다스리겠다는 말까지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황해도 관찰사로 있던 김홍욱이 세자빈 강씨의 신원을 복권하고 이때까지도 유배 중이었던 셋째 아들 경원군의 석방을 요청하는 직언으로 조정에 파문이 일어났다. 그러나 효종은 분노하며 김홍욱을 압송해 곤장을 때려 죽였다. 또한 자신의 조카인 경원군의 유배를 풀어주지 않았으며 지금의 강화 교동도로만 옮겨주었다가 효종이 죽을때 그 이름만은 복권되었다.
여튼 이러한 세월이지나 숙종 1718년에 이르러 드디어 세자빈 강씨는 신원이 되었으며, 숙종은 세자빈 강씨의 총명함과 덕을 친송하며 제문을 짓기도 하였다. 세자빈 강씨의 일가 역시 이때 겨우 신원되었다.
한편, 세자빈 강씨는 지금의 광명시에 묻혀 있다. 그 남편 소현세자가 경기도 고양 서삼릉에 있는데, 죽어서도 같이 묻히지 못하였으니 그 아쉬움이 크다 하겠다.
지금까지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죽인 희대의 사건과 그 주인공 세자빈 강씨를 조명해봤다. 인조의 찌질함 덕분에 조선은 일본보다 100년은 더 빨리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며 강대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잃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뒷면에는 세자빈 강씨의 억울함과 슬픔도 같이 동반되어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인조가 최악의 왕이라 불리는 이유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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