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명량에서 노량까지, 임진왜란 숨은 명장 안위 장군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24. 3. 23.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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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에서 노량까지, 임진왜란 숨은 명장 안위 장군 그는 누구인가?

임진왜란 구국의 영웅 이순신 장군에게는 그와 함께 목숨을 바쳐 싸운 명장들과 조선의 군대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안위 장군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명량부터 노량까지 큰 공을 세운 장수이자 이후 병자호란이 일어나는 인조때까지 나라를 지키려 노력했던 장군이다. 안위 그는 과연 누구일까?
 

영화 명량 안위 장군
영화 명량 안위 장군

 

1. 역모의 집안으로 유배를 가야 했던 '안위 장군'

1563년, 지금의 전라도 김제에서 안위 장군은 3남 1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렸을 적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으나 그의 나이가 26살 되던 1589년, 5촌 사이의 친척이었던 정여립이 난을 일으키며 안위는 갑작스럽게 지금의 평안도로 유배 된다. 다행히 당시 역모죄가 삼족을 멸하는 죄임에도, 처형은 면했지만 안위 입장에서는 한창 관직에 나아갈 나이에 잘 알지도 못하는 친척 때문에 유배를 가게 된 것이다. 

2. 임진왜란 발발 '안위 장군' 다시 전장터로 

유배지에 온지 3년,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한양이 왜군에게 점령당하자 그는 유배소를 탈출하여 평양으로 향했고 어느 이름모를 병사의 부하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름모를 병사의 부하로 있을만한 위인은 아니었던지, 당시 조정의 중신이었던 이항복의 눈에 띄어 군대의 부장급인 조방장직을 맡게 된다. 

이후 1594년 거제 현령직을 맡게 되었고 당항포 해전에서 왜선 한 척을 불태우는 공을 세운다. 

 
유배지에 온지 3년,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한양이 왜군에게 점령당하자 그는 유배소를 탈출하여 평양으로 향했고 어느 이름모를 병사의 부하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름모를 병사의 부하로 있을만한 위인은 아니었던지, 1592년 무과에 급제했고 당시 조정의 중신이었던 이항복의 눈에 띄어 부장급인 조방장직을 맡게 된다. 

이후 1594년 거제 현령직을 맡게 되었고 당항포 해전에서 왜선 한 척을 불태우는 공을 세운다. 

불멸의 이순신 안위 장군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안위 장군

 

3. 안위 장군의 레전드 활약 '명량대첩'

안위 장군이 임진왜란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 할 때, 조선 수군은 최악의 시간을 보낸다. 연일 승전을 하고 있던 이순신 장군을 백의종군을 하게 하고 원균을 조선 수군의 대장으로 삼으면서 칠천량해전에서 왜군에게 조선수군이 궤멸을 한 것이다. 

조선 수군의 대패에 멍청한 조정은 다시 후회하며 이순신 장군을 불러들였고, 불과 12척의 배가 남은 상태에서 대대적인 왜군과의 전쟁을 준비하니 이것이 바로 명량대첩이다. 이때 안위 역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출전했는데, 그 기록은 난중일기에 잘 소개 되어 있다. 

적선 130여척이 우리 배를 둘러쌌고, 안위를 포함한 조선의 다른 장수들은 멈칫하고 있었다. 대장기를 세워 싸우자고 독려하니 거제 현령 안위의 배가 가장 먼저 왔다. 그때 이순신 장군은 배위에서 안위에게 말한다.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은 것이냐? 도망간다고 어디서 살것이냐?"라고 했다. 

그러자 안위는 서둘러 왜선들 사이로 나아가 치열하게 싸우기 시작한다. 안위의 배에 왜선 3척이 둘러싸고 근접전을 벌이는 등 위기에 빠지기도 했으나 이순신장군의 대장선과 함께 치열하게 왜선을 무찌르기 시작한다. 안위의 전투에 조선의 다른 수군 장수들도 함께 참전하면서 명량해전은 기적적으로 조선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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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위 장군은 이순신 장군의 명령에도 멈칫하던 조선 수군들의 앞장서서 돌진을 하였고 이 같은 솔선수범이 명량해전에 큰 공이 될 수 있었다. 일각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문장에서 "군법에 죽고 싶으냐?"라는 말 때문에 안위 장군이 나선 것으로 보이나 한창 전쟁중에 바로 옆에서도 들리지 않는 이순신 장군의 목소리를 듣고 움직였다기 보다는 대장선으로 모여든 왜군의 모습을 보고 구해야겠다는 결심으로 진격했다는 것이 더 일리가 있겠다. 

4.  '노량해전'과 임진왜란 이후 안위 장군의 삶

명량해전 직후, 이순신 장군은 안위를 최고의 공을 세운 장군으로 조정에 알렸고 안위는 전라우수사가 된다. 이후에도 난중일기에 안위라는 이름이 45번이나 등장하는데 이것만 봐도 안위가 얼마나 이순신 장군을 지척에서 보필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여튼 안위장군은 명량해전 이듬해 발발한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였던 노량해전에도 참전하였고 함께 끝까지 싸운다. 이러한 공으로 안위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전라수사, 충청병사, 평안방어사까지 역임한다. 

이후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가 안위를 대장 자리까지에도 올리려고 했으나 당시 인조를 왕위에 올린 공신들이 이를 반대하여 벼슬에 오르진 못했고 고향에 돌아와 머무른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대표적 장수로서 안위가 존재 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일이라 할 수 있겠다. 
 
더 놀라운 것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다는 소리를 듣고 안위는 당시 나이 74세였음에도 왕을 보필하기 위해 한성으로 향했다가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대피하자 길이 막혀 들어가지는 못한다. 이후 병자호란이 끝나고 1644년, 그의 나이 82세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안위 장군의 묘는 안위장군이 태어난 김제 땅에 있다. 


명량해전이라는 우리 역사에 있어 기적 같은 승리에 있어 난중일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이순신 장군이 안위 장군에게 강하게 꾸짖었다는 대목이 나와 안위 장군의 능력과 용기가 부족해보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의 일생을 볼 때, 안위 장군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라를 위해 싸웠던 맹장이자 지장이었고 용장이었고 충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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