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금, 허준, 백광현?! 사극으로 제작된 조선 대표 명의 BEST 3
우리가 흔히 근대의 의학이 도입되기 전 동양의 명의를 뽑으라면 중국의 화타, 조선의 허준을 뽑곤 한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는 생각보다 많은 명의들이 있었고, 하나같이 스토리가 있어서 드라마로도 많이 제작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사극으로 제작된 조선 대표 명의 4명을 소개해보려 한다.
1. 뭐야 실존인물이었어? 어의가 된 의녀 '대장금'
워낙 사극 대장금이 높은 관심을 받았고, 음식을 잘하는 것으로만 알려져 있다보니 실제 그녀의 의술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실제 역사속에서 대장금은 음식으로 유명한 것이 아니라 동시대에서 오직 한명만 할 수 있는 임금을 전담하는 어의 역할을 했던 의녀였으며 이는 조선 역사를 통틀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 놀라운 일이었다.
대장금은 중종 10년(1515)에 처음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다. 중종의 계비였던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고 일주일만에 죽는 사건이 발생면서 이때 담당 의원이었던 하종해와 함께한 의녀 대장금이 문책 당할 위기에 빠진다. 사헌부와 대신들은 하종해와 대장금을 문책 해야 한다며 주장했는데 중종이 이를 거절했다는 기록이다. 이를 봐서는 이미 역사에 기록되기전부터 대장금은 중종에게 어느정도 신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7년뒤, 중종 17년에 대장금은 다시 한번 역사에 등장하는데, 중종의 어머니인 자순대비가 감기를 앓아 대장금에게 치료하게 했고 의원 하종해와 함께 자순대비의 병을 호전 시켜 의녀 신비와 장금이 쌀과 콩 10석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기록에 모두 나와 있지 않겠지만 대장금은 의녀로써 역할을 다하였고 많은 공을 세웠기에, 중종을 간병하는 어의녀로서 임명된다. 그러나 당시 어의는 오직 남자여야만 했고 의학이라는 것도 양반이 할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장금은 중종의 몸이 안좋을 때마다 항상 공격을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중종은 대장금을 신뢰했고 대장금은 중종의 종기를 낫게하는 등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하지만 중종 39년, 나이가 57세인 중종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이때도 중종은 대장금을 통해 약에 관해 전달할테니 상의하도록 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때 중종이 말한 의녀 역시 대장금으로 조선역사에서 의녀에게 왕의 병을 상담하라는 명이 내려진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이러한 믿음과 함께 2월, 대장금은 다시 한 번 중종의 증세를 가라앉히는데는 성공한다. 하지만 그해 10월 중종의 병세는 악화되었고 내의원 홍언필이 중종을 문안하면서 "증세가 심한 것이 아니며 의녀가 진맥을 한다고 하니 천박한 식견으로는 모를 것이며 박세거로 하여금 진백하게 하소서"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중종은 오히려 대장금에게 자신의 병을 맡게 한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대장금이 중종의 위급한 증세를 알고 대신들에게 브리핑을 하였고, 며칠을 중종의 병세를 다스리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결국 중종은 눈을 감고만다.
이후 대장금의 기록은 사라진다. 아무래도 왕이 죽으면 당시 왕을 치료하던 사람들은 유배되거나 강등되거나 했는데 대장금 역시 그러한 것으로 보인다.
2. 동의보감을 집필한 조선 최고 명의 '허준'
두말 할 것 없이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명의를 꼽으라면 사람들은 단연 허준을 꼽을 것이다. 선조 8년에 명의라는 타이틀로 관직없이 실록에 등장한 허준은 다시 12년뒤인 선조 20년에 이번에는 어의라는 관직으로 등장한다. 12년만의 어의 타이틀이라는 것은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의 의술이 무수한 경로로 이미 입증되었으며 많은 공을 세워 선조의 신뢰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허준은 1575년부터 선조를 진료 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도 선조의 곁을 떠나지 않고 몽진 내내 건강을 살폈다. 또한 임진왜란 중에도 광해군의 천연두까지 고쳐내며 종 2품, 지금의 차관자리에 올랐다. 이후 선조의 명에 따라 조선의 실정에 맞는 의학책인 <동의보감>을 집필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선조는 허준의 공로를 인정하여 종1품까지 하사하게 된다. 당시 의학이 잡과로 천대 받으며 진급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허준은 이를 실력으로 당당히 뚫어버린것이다. 그러나 1608년 선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어의였던 허준 역시 그 책임을 피하지 못하고 귀양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1년 뒤, 허준은 광해군의 어의로 다시 조정에 복귀하였으며 이후 동의보감 편찬에 매진하였고 마침내 1610년, 동양 최대의 의학서적인 동의보감을 편찬하였다. 다만 동의보감이 온전히 허준만이 쓴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엄밀히 말하면 허준이 주축이되어 당시 어의들이었던 양예수, 정작, 이명원 등과 함께 집필한 것이긴 하다.
이후에도 허준은 전염병 관련한 각종 의서 편찬은 물론 평생을 백성을 돌보다가 1615년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3. 말의 건강을 돌보다가 어의가 된 마의 '백광현'
사극 마의로 잘 알려진 백광현은 조선 현종과 숙종 때 침술 하나로 이름을 날린 명의이다. 사실 백광현은 비천한 신분으로 글도 읽을줄 몰랐는데 어디선 배운지는 모르겠으나 침술로 종기까지 치료하는 인물로 명성이 자자했다. 영조 정내교라는 인물이 쓴 <완암집> 기록에는 말을 치료하다가 그 침술의 솜씨가 노련해졌고 당시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의 여러 종기를 목격하고 침으로 치료하며 경험을 쌓았다고 쓰여있다.
요즘이야 수의사가 존경 받지만 조선 당시 수의사는 비천한 신분만 하는 직업이었다. 하지만 백광현은 말을 치료할 때도 진심으로 치료하였으며, 특히 침을 사용해 최초의 종기절제술을 시도했던 기록도 있다. 여튼 이러한 명성이 한양까지 당도하자 백광현을 의관으로 채용했다고 하는데, 그가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46세때로 현종 11년의 일이었다. 백광현은 이때 현종을 치료한 공로를 인정 받아 벼슬과 상을 받았다.
그리고 14년 뒤 숙종 10년에 다시한번 60세의 나이로 백광현이 등장하는데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백광현을 포천 현감으로 임명하였다는 기록이다. 백광현을 향한 숙종의 믿음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백광현은 그가 사망하는 73세까지 어의 생활을 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백광현은 병자를 보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즉시 달려가 환자가 나은 것을 봐야 진료를 그만 두는 성격이라고 하였으며 나이가 많음에도 핑계대지 않고 게으르지 않았다고 전한다.
백광현이 죽은 후 당시 세간에서는 종기가 심해지면 '백태의가 없으니 이제 죽는 일만 남았구나' 라는 말이 돌았으며 영조는 백광현을 침의를 선발하는 기준으로 삼으라는 명을 내릴 정도였다고 한다. 글도 읽지 못하는 비천한 신분에서 오직 실력으로 어의가 된 백광현은 엄격한 신분질서를 요구하던 조선을 부끄럽게 하는 신분 상승의 사례라 할 수 있겠다.
사극으로 만들어진 조선의 명의를 주제로 내용을 구성해보았다. 여기에 조선말 활약했던 태양인 이제마도 넣을까하다가 이제마의 일생은 사실 사상의학을 만든 것을 제외하고는 의학과는 먼 삶을 살았기에 굳이 넣지는 않았다. 여튼 대장금, 허준, 백광현은 자신의 신분과 의학을 낮게 보았던 당시 사회적 인식을 이겨내고 우리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명의이며 더 나아가 우리 한의학에도 영향을 끼친 위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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