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단종복위의 꿈 사육신의 배신자 김질 최후는? 그는 누구인가?
어느시대나 의리와 충절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아마 조선 500년사에서 가장 충신들을 꼽으라면 왕권을 찬탈한 세조에 반기를 들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던 사육신(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들 알 듯 이들의 거사는 한 인물의 배신으로 실패했으니, 그 인물이 바로 김질이다. 김질의 최후 과연 어땠을까?
1. 김질의 출생과 성장
1422년 조선 초 대표 공신 가문인 (구)안동김씨 가문에서 태어난 김질은 고조할아버지가 개국공신 김사형, 아버지가 영의정 김종숙을 두어 그야말로 당대 최고의 가문이라 불릴만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참고로 안동김씨는 구,신으로 편의성 두 가지로 나누는데 이후 조선말 세도정치를 일삼아 조선이 망하는데 일조한 안동김씨는 신안동김씨이므로 김질의 가문과는 다르다.
여튼 가문 덕택에 음서제를 통해 벼슬길에 오른 김질은 종5품 부사직 재직 중 1447년, 25살의 나이로 생원시에 합격했고 1450년 성균관에서 학문을 배우고 싶다고 요청하여 성균관에서 이를 허락하며 김질은 성균관에서 배움을 이어가게 된다. 과거에 합격한 것이 아닌데 추후 배움을 위해 성균관에 입학한 그의 계기를 통해 조선조에는 성균관의 이러한 수학제도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이후 1450년 문종대에 이르러 문과에 응시 급제하였고 세종대부터 이어져온 우리나라의 엘리트코스인 집현전학사가 되어 훗날 단종복위를 모의 하는 사육신의 대표격인 성삼문, 박팽년, 최항은 물론 신숙주, 김문기 등과 함께 연을 맺고 문종의 큰 신뢰를 받는다. 즉 다른 사육신들과 김질은 한 직장에서 배우며 근무한 인연이 있던 것이다.
2. 문종의 죽음과 계유정난이 일어나다
김질은 문종대에 집현전의 중심인물로서 신숙주, 김문기, 성삼문 등과 함께 우정을 쌓았고 왕의 총애를 받는다. 문종은 1450년 왕위에 37세의 나이에 올랐는데 이미 이전부터 세종의 뜻을 이어 받아 직접 나랏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담 없이 세종대와 같은 치세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문종의 건강은 좋지 못하였고 당시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의 왕실 권력은 물론 김종서, 황보인과 같은 신권들이 충돌하면서 왕권이 안정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를 채 매듭짓지 못한채 2년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때 문종은 이같은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어린 아들 단종을 잘 부탁한다면서 유언을 남겼는데, 이때 부탁한 인물들이 바로 자신이 아꼈던 집현전 학사들이었고 김질 역시 여기에 포함되었다.
1453년, 12세의 나이에 왕위에 단종이 오르긴 했지만 숙부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으로 인해 그해 바로 모든 실권을 수양대군에게 빼앗기고 만다. 단종 2년인 1454년 김질은 당시 수양대군의 신임을 받아 종 6품에서 4품으로 벼슬이 올랐는데 아무 힘조차 없던 단종이 김질을 6품에서 한번에 4품으로 벼슬을 올린 것에 대해 수양대군에게 문제를 제기했지만 수양대군은 무시하고 이같은 결정을 그대로 진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1455년 힘없는 어린왕 단종은 폐위되고 마침내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세조이다. 한편, 세조 1년에 김질은 성균관 사예에 오르며 세조에게 나름의 사랑을 받게 된다.
3. 사육신의 동지들을 배신하다
1455년 6월 세조가 집권하고 자신의 왕권 강화 정책이 계속되는 동안 성삼문, 박팽년, 김문기,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와 김질은 단종의 복위 운동을 위해 세조를 제거 할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이 거사날을 세조가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맞는 날로 정한다. 이같은 결정을 한 것은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 박쟁, 유응부가 큰 칼을 차고 왕을 호위하는 별운검(지금의 경호원)의 임무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환영 잔치에 배치하려던 별운검을 세조의 책사 한명회가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갑자기 배치를 취소하게 하면서 거사는 중지된다. 이때 환영 잔치에 들어갈 수 없던 성승, 박쟁, 유응부가 거사를 하려 하였으나 성삼문과 박팽년이 말렸는데 나머지 별운검 3명은 비밀이 누설될 가능성이 있어 거사를 치뤄야 한다며 옥신각신하다가 거사를 포기하고 다음 기회를 노리려고 한다.
그런데, 이를 지켜본 김질이 자신들의 모의가 실패로 끝나자 두려움반 야심반으로 이를 고변하여 살길을 도모하고자 한다. 이에 급히 우찬성으로 있는 처당숙(정창손이 장인이라는 말이 있으나 김질의 신도비문을 보면 정창손은 김질의 처당숙으로 기록) 정창손을 찾아가 이같은 모의를 고변하였고 정창손과 함께 급히 세조를 찾아가 이 모든 내용을 말하니 세조가 분노하여 모든 역모의 연루자들을 잡아드리도록 했고 모두 삼족이 멸하는 극형을 당한다. 이때 처형된 사람만 120명이 넘었다.
4. 김질 승승장구하다
세조는 처음에 김질 역시 모의에 가담했다는 것에 분노했지만 그래도 역모에 대한 고변에 고마움을 느끼며 김질의 공을 인정한다. 이후 좌익공신 승급은 물론 사육신 가문의 가족들 중 동지들의 아내를 하녀로 받았고 1456년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어 공신대표로 명나라에 파견되기도 한다. 이후 성균관의 시험 총감독관으로 나라의 인재를 살피기도 한다.
이후에도 병조참판이 되어 세조와 국방정책을 의논하고 평안도 황해도의 도순찰사로 순찰을 수행하였으며 세조의 부국강병을 위해 양반이든 평민이든 군역을 부과시켜 나라의 곳간을 채우는데 힘썼다.
여기에 1463년 공조판서로 승진하고 병조, 형조를 거쳤으며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세조기간 내내 승승장구를 한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우의정 자리에 올랐으며, 세조의 공신세력인 한명회, 신숙주와 함께 어린 예종과 성종을 보좌하는 원상세력으로 부와 권력을 거머쥔다.
5. 김질의 최후
예종이 죽고 성종이 왕위에 오른뒤에도 원상세력으로 왕실을 견제하는 한편 이때도 부와 권세를 누린다. 경국대전 편찬에 참여하는 한편 고려사절요 등의 편집에도 참여하는 등 행보를 보였다. 세조, 예종, 성종 모두가 김질을 신임했으며 비록 동료들은 배신했지만 나라를 위해서는 많은 공을 세웠다. 이후 1478년 그의 나이 56세로 사망하였고 지금의 포천에 그의 묘가 있다. 김질의 후손으로는 인조때의 간신 김자점이 있으며, 방계 후손으로 김구 선생 등이 있다.
지금까지 사육신의 배신자지만 정치력과 행정력에서 인정을 받으며 세조, 예종, 성종에게 고루 신임을 받았던 정승 김질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좋은 집안에서 고위직까지 오른 그의 인생은 편안했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배신의 행보는 역사속에서 잊혀지지 않고 지금까지도 후손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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