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넷플릭스의 대작 영화 전,란에서 배우 강동원이 역할을 맡은 천영이 실존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이 작품속에서 천영이라는 인물은 천한 신분의 노비지만 임진왜란의 수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우는 인물로 나온다. 실제 역사에서도 천영과 같은 인물이 있었다. 바로 금남 정충신 장군이다. 엄격한 신분제를 넘어 조선의 장수가 된 천영 실존인물 정충신 그는 누구일까?
1. 천민으로 태어난 정충신
1576년 지금의 광주 지역의 아전이었던 정윤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양인이었지만 정충신의 어머니는 당시 정윤이 데리고 있던 종이었던지라 정충신은 어렸을 적, 글하나 배우지 못하고 자랐다고 한다. 정충신의 탄생일화는 재미있게도 조선의 야담을 담아놓은 <계서야담>에 기록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정윤이 잠을 자고 있었는데 그의 꿈에 광주 무등산이 갈라지며 청룡이 나왔고 갑자기 정윤의 몸을 휘감았다. 이상한 꿈에 정윤은 이상하게 여기며 다시 잠을 잤는데 잠에 들자마자 이번에는 꿈에 갑자기 백호가 뛰어 안겼다. 이때 정윤의 나이가 60이었음에도 아들이 없어 고민이었는데 이 꿈이 상서롭다 여기고 자신이 데리고 있던 종과 잠자리를 가졌다. 이후 종이 아이를 낳으니 그가 바로 금남군 정충신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정충신의 아버지는 지금의 7급 공무원 정도 되는 아전이었고 그 어머니가 종인 천민 신분이었다. 당시 조선사회의 법이 부모 중 한명이 천민이면 천민이었던지라 정충신 역시 천민으로 자라나게 된다. 하지만 신분을 넘어 정충신은 자신의 신분과는 상관없이 어렸을적부터 지혜와 재능이 출중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아꼈다고 전해진다.
2. 임진왜란 발발 17살의 나이로 권율의 병사가 되다
정충신의 나이가 17세가 되던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왜군이 부산을 침공하여 북으로 계속 올라오자 한양에 있던 선조는 의주 땅으로 피난을 가고 우리가 잘알고 있는 권율에게 광주 지역을 지키라며 광주목으로 임명한다. 정충신은 이때 권율의 노비가 되어 전쟁 한복판에 발을 딛게 된다.
정충신은 자신의 신분과 나이를 모두 극복하고 권율 밑에서 많은 공을 세웠는데, 그 중 두 가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2.1 정충신의 당돌한 임진왜란 일화
권율이 어느날 정탐병을 적진으로 보내 왜군 부대를 탐색하게 하였는데 정충신이 자신도 함께 정탐병에 섞어 보내달라고 한다. 권율은 처음에는 어린 정충신이 위험하다하여 거절했지만 정충신이 완강히 요청하여 이를 허락해준다. 정충신이 정탐병들과 함께 왜군이 있던 마을에 내려갔더니 왜군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런데 정충신의 눈에 깨진 독 하나가 보였고 정충신은 이 독을 굴리다가 화살로 쏘았고 독에 있던 왜군이 화살에 맞아 죽었다. 정충신은 이 왜군의 목을 자르고 진영으로 돌아오니 권율이 더욱 정충신을 아꼈다.
2.2 정충신 선조의 망명을 막다 - 평민이 되다
임진왜란 18일, 마침내 왜군은 한양을 점령했다. 당시 선조는 의주로 이미 도망가 있었는데 한양까지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예 도망가 명나라로 망명을 해버리려 한다. 그러나 왕이 도망가는 것은 당시 우리의 백성과 남아 있는 조선군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행동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리스크가 있어 선조와 조정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조선에는 성웅 이순신이 해전에서 연전 연승하고 권율 역시 호남에서 왜군을 막아내었으며 곳곳의 의병들이 왜군의 발목을 잡기 시작한다. 권율은 이 소식을 선조에게 전해 선조를 안심시키고 망명을 막고자 하였는데, 선조가 있는 의주까지 가려면 그 길이 멀고 위험했기 때문에 아무도 가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17살의 정충신이 자신이 가겠다고 다시 나섰다. 정충신은 권율의 만류에도 개의치 않고 선조에게 올릴 장계를 받아 그 장계를 짚을 꼬아 만든 것에 감쪽 같이 감추고는 그 먼길을 달려 의주의 선조에게 전했다. 광주에서 의주까지 17살 소년이 그것도 전쟁통을 뚫고 갔다니, 정충신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선조는 권율의 장계를 받고는 명나라로 망명을 하지 않았고, 선조는 정충신의 노력에 감명하여 어명을 내려 정충신을 평민으로 승격시켰다.
또한 당시 병조판서인 오성 이항복이 정충신의 이 같은 총명함을 알아보고 제자까지 삼았으며 '충신' 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다. 그리고 그해 가을 정충신은 전쟁통에 열린 무과 과거까지 급제하게 된다.
한 천민 소년이, 이러한 엄청난 공을 세우고 무과까지 급제하며 벼슬길에 오른 것을 사실이냐고 의심할 법한데, 이는 야담이 아닌 모두 실제 기록에 남겨져 있다. 그만큼 정충신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3. 광해군대에 이제는 북쪽을 바라보다
1602년, 임진왜란이 끝난 후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정충신은 명나라 사신으로 가기도 하고 북쪽 기운이 심상치 않자 그곳의 만호 역할을 맡는 등 벼슬 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1617년에는 왜로 보내는 조선통신사 행렬에서 대신 오윤겸을 호위하는 군관을 역임하기도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의 벼슬은 그리 높지 않았다.
3.1 정충신, 스승 이항복을 끝까지 따르다
정충신이 이런저런 벼슬을 하며 점차 그 능력을 인정 받던 사이, 1617년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폐모하겠다는 결정을 한다. 그러자 스승 이항복이 나서며 결사 반대를 하였는데, 광해군은 이러한 이항복을 유배 보내버린다. 이때 정충신은 자신이 힘들게 얻은 벼슬을 모두 버리고 스승 이항복을 따라 유배길을 함께 하며 기록을 남기는데 이것이 바로 북천록이다.
이때 이항복은 중풍에 걸려 몸도 가누기 힘든 상황이었는데 이항복은 끝까지 그를 보필했고, 이항복이 죽고 난뒤에도 3년상을 치룬다. 그냥 클래스가 다른 의리였던 것이다.
정충신은 이후 광해군의 명을 받아 북방에서 활동하며 급변하는 당시 중국의 사태를 관망했고 떠오르는 후금(청나라)의 규모와 동향을 조정에 알리는데 활약한다. 특히 청나라의 후계 구도에서 조선을 적대시하던 홍타이지를 살피는데 정충신은 역할을 하게되며 이후 후금의 침략을 예견하고 이를 방어하는데 힘을 쓰는 한 편, 명나라와 청나라의 중립 외교에 힘을써야 한다고 알리는데 앞장선다.
4. 정충신 이름을 높이다 - 이괄의 난
이괄의난을 알기 위해서는 광해군이 쫓겨나 인조가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조선 조정과 동북아 정세를 알아두는 것이 좋다.
4.1 광해군이 쫓겨난 배경
먼저 여진족 국가인 후금이 망해가는 명나라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시작하면서 후금에게 전세가 기울었다. 때문에 조선의 입장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워진다. 왜냐하면 명나라가 무너져 감에도, 임진왜란에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를 배신할 수 있는 명분이 없었을뿐 아니라 당시 양반들은 명나라와의 의리와 유교에 입각한 외교를 중시했기 때문에 명나라를 끝까지 따르려 한다.
이에 광해군은 명나라의 원군 요구를 들어주며 한편으로는 후금과도 싸우지 않기 위해 뒤에서 노력하는 아슬아슬한 외교 줄타기를 한다. 하지만 이는 당시 명나라를 높이던 조선 조정의 반발을 살만한 외교 형태였고, 이는 광해군이 쫓겨나는 주요 명분이 된다.
여기에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배다른 어린 동생 영창대군을 죽이면서 자신의 왕권을 강화해가는데, 이 역시 엄격한 유교사회에서 패륜을 저질렀다는 명분을 쌓기 충분했다. 결국 광해군은 신하들에 의해 쫓겨나고 그 뒤를 이어 인조가 즉위하니 이것이 바로 인조반정이다.
4.2 이괄의 난
인조반정 가운데서 이괄은 큰 공을 세운 장군이었다. 그러나 논공행상중에 이괄은 2등공신에 책봉되었고 북으로 파견을 떠나 국경을 수비하라고 하자 이괄은 분노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특히나 당시 조정에서는 이괄에게 북방 수비의 책임을 주고 정예병들을 붙여 주었는데 그 수가 수만에 이르렀다.
조정은 처음에는 이괄과 친분이 있던 당시 안주방어사로 있던 정충신도 반란 세력이라고 의심하였는데, 정충신은 당시 도원수로 있던 장만에게 나아가 해명을 하고 당당히 이괄 토벌대의 선봉에 선다.
하지만 이괄과 그가 이끄는 정예부대의 초반 기세는 엄청났고 토벌의 선봉장 정충신 역시 불리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깜짝놀란 인조는 공주로 피난갔고, 이괄은 마침내 한양을 점령하고 경복궁에 들어가 흥안군을 왕으로 삼기에 이른다. 이때 정충신은 만약 인조를 쫓아 내려갔으면 어찌될지 모르나 한양에 그대로 주둔한 것을 보고 이 전쟁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중에 장만과 정충신 휘하장수들의 의견은 엇갈린다. 다른 장수와는 달리 정충신만이 지금 다시 싸워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이를 받아드린 토벌군은 한양의 이괄을 포위하고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고 이천으로 도망간 이괄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목이 베어 최후를 맞이하면서 결국 난은 실패로 돌아간다.
이괄의 난 이후 논공행상에서 정충신은 그 공을 인정 받아 일등공신이 되며 금남군이 되었고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계급이 오르며 조선을 대표하는 장군 자리에 오르게 된다. 참고로 지금의 광주의 유명한 거리인 금남로가 바로 이 정충신의 호를 딴 것이다.
5. 정묘호란과 정충신의 죽음
이괄의난 이후 인조는 더욱더 망해가는 명나라를 따르고 후금을 무시한다. 이에 후금은 조선을 침략할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정충신만이 이를 간파하고 후금의 동태를 상세히 인조에게 보고한다. 또한 북방의 방비를 강화하고 후금과의 전쟁을 피하는 한편 화친을 통해 후금의 침략을 막으려 해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조정은 아무 이득 없는 명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있었고 정충신의 말도 무시하며 허송세월을 보낸다. 그리고 1627년 마침내 청나라가 된 후금이 쳐들어오는 정묘호란이 일어난다. 정충신은 와병중에도 부원수 자리를 맡아 수비에 나서서 방어 하는데 총력을 기울인다. 정묘호란이 겨우 수습되고 정충신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청나라와의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가 귀양을 가기도 했지만, 인조가 다시 관직을 맡기는 등 말년이 편치 않았다.
그리고 1636년,병자호란이 일어나기 7개월 전에 정충신이 62세의 나이로 눈을 감으니, 인조는 슬퍼하며 충무라는 시호를 내리고 자신이 입던 도포를 수의로 입혀 보낸다. 정충신의 묘는 현재 충청남도 서산 있다. 어쩌면 답답한 조선의 꼴을 안보고 죽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정충신은 이마저도 하늘에서 안타까워 했을 인물이다.
정충신은 군사, 외교, 천문, 지리, 의술에도 능했으며 무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또한 그 얼굴까지 잘생기고 말까지 잘했으며 그가 없으면 당시 군대가 안돌아갈 정도라고 하니 정말 완벽한 인물이었음에는 분명하다. 물론 그랬기 때문에 천민으로 태어나 1등 공신이 되었겠지만 말이다.
참고로 그는 인품까지 좋아 아랫사람에게 한없이 친절했고 그의 집은 도둑이 들어도 책밖에는 없을 정도로 공신이 되어도 소탈하고 청렴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완벽한 인물이 있나 싶다. 그래서 더더욱 이번 영화 전,란에서 강동원이 그 역할을 한다고 하니 기대된다.
정충신 그의 삶을 기억하며 영화를 즐겨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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