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지정학적 위치상 다른 국가들의 침략을 끝없이 받아왔다. 그중에서도 1592년 시작된 임진왜란은 그 어떤 침략보다도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는 처참했다. 그러나 우리 백성들은 자신들이 나라를 위해 앞장서기 시작했고 그 결과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 왜군과 맞서 싸웠다. 여기 영화<전란>에서 배우 진선규가 맡은 의병장 김자령의 실존인물이 있다. 바로 의병장 김덕령이다. 오늘날 수많은 설화와 임진왜란의 영웅이라고 불리고 있는 김덕령 그는 과연 누구일까?
1. <전란> 실존인물 김덕령 출생과 설화
김덕령은 광산김씨로, 1568년 지금의 광주 북구 충효동 무등산 아래에서 태어났다. 집안대대로 유학 집안으로 어려서부터 글공부를 하였으며 무등산 아래에서 무예까지 익혔다고 전해진다. 김덕령이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임진왜란 후 의병으로 활약하던 때지만 김덕령과 관련된 설화가 워낙 많은지라 그의 태몽에 관한 설화도 있다.
"김덕령의 어머니인 반부인이 꿈에 두 마리 호랑이가 무등산에서 내려와 방안으로 온 것을 보고 임신을 하였고, 만삭이 되자 또 두마리 호랑이가 무등산에서 내려와 방안으로 들어왔고, 이후 출산할때는 실제 호랑이 두마리가 내려와 문 밖을 지키고 있다가 해산 후 다시 돌아갔다"
1.1 설화적 인물 김덕령
김덕령은 앞으로 계속 말하겠지만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정사 이외에도 유독 많은 설화가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쭉 전해져왔던 인물로, 이를 볼 때 왜란 당시 핍박받던 백성들에게는 분명 칭송 받는 장군 중 한명이 아닌가 추측된다.
특히 김덕령의 유년시절 설화는 유독 용력이 강하고 용모가 준수하며 몸이 날쌔다는 영웅적인 설화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대표적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8세에 김덕령은 용모가 준수하고 기질이 안정하여 눈의 광채가 사람을 쏘는 듯하여 능히 십리 밖의 물건도 보았으며... 뭇 아이들과 장난하며 놀 적에도 거동이 이상하였지만 그의 용력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덕령의 부모도 그가 용력이 있는 줄을 몰랐다. <김충장공유사>
2. 김덕령과 임진왜란
김덕령의 임진왜란 이야기는 영화 같지만 또 한 편으로는 영화 같지 않고 매우 현실적이다. 이유는 그 명성에 비해 임진왜란에서 활약이 약하기 때문이다.
2.1 김덕령 의병 출병 배경
1592년 김덕령의 나이 25살에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김덕령은 자신의 형 김덕홍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자고 의기투합하였고, 당시 호남지역 대표적 의병장인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킴에따라 그의 휘하로 들어가 전주까지 함께 진군하며 활동한다. 그러나 김덕령 형제의 어머니 병환이 심각해지자 형 김덕홍은 김덕령에게 어머니를 돌볼 것을 권유했고, 김덕령만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집으로 돌아간다. 이후 형 김덕홍은 고경명과 함께 제 1차 금산전투에서 순국하게 된다.
이를 모두 지켜본 김덕령은 무등산에서 무예를 연마하고 무기를 만들며 때를 기다린다. 1593년 당시 호남지역은 김시민 장군의 진주성 1차 방어전 이후 버티기는 했지만 경상도 지역이 유린됨에 따라 경상도 방어에 총력을 기울여야 하는 상황이었고 조선군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다시말해 조선군은 단 한명의 의병이라도 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때 때마침 담양부사 이경린이 김덕령을 알아보고 장계를 올려 전라도 관찰사 이정암에게 추천하였고 이정암이 김덕령에게 위급함을 알리며 의병을 일으켜달라는 요청을 하자 김덕령은 마침내 의병을 일으킬 결심을 한다.
2.2 김덕령 광해군을 만나다
김덕령은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집안의 땅을 팔아 군자금을 마련했고 격문을 돌리니 병사 1천이 모였다. 이후 담양부사 이경린, 장성현감 이귀 등이 적극 도와주면서 그의 가족들 역시 김덕령의 참모이자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김덕령의 의병이 군의 모습을 갖춰가자 전라도관찰사 이정암은 광해군이 이끄는 분조에게 김덕령의 의병을 소개하였다.
이후 1593년 12월 김덕령은 전라도 삼례 지역에서 광해군을 만났고, 광해군은 이곳에서 무과시험을 열었는데 당시 김덕령이 시범을 보였는데 그 용력과 기세가 장관이었다고 한다. 이를본 광해군은 김덕령에게 '익호장군'이라는 군호를 내렸고 선조는 김덕령군대에게 '충용군'이라는 군호를 내려 조정에서 인정을 받는 의병이 된다.
2.3 김덕령의 임진왜란 전과
1594년 선조는 김덕령에게 전국의 의병군을 모아 운용하는 의병총수로 임명하며 김덕령의 명성은 더욱 높아간다. 그러나 의병군이 5천명 가량으로 불어남으로 김덕령 부대는 군량미 부족에 직면하였고 이에 김덕령은 의병들을 돌려보내 500명 정도만 남기고 둔전 등을 설치하여 농사를 짓도로 한다.
그러나 김덕령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아이러니하게도 김덕령 부대가 활동하던 시기는 명나라와 조선 그리고 왜군이 강화협정을 하던 시기로 전투 등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할 것 없던 김덕령군의 사기 역시 점차 떨어져 갔다. 여기에 몇몇 소규모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둔적이 있긴 하지만 김덕령의 명성과 기대에 비해 큰 공을 세울 기회가 없었으므로 점차 김덕령에 대한 모함 등이 심해지기 시작한다.
이에 조정에서는 더 나아가 김덕령에 대한 초기 반응을 거두고 능력에 의문을 품었으며, 엎친데 덮진격으로 김덕령의 엄격한 군법 적용에 따른 많은 부작용들이 일어나며 문제가 발생한다.
3. 김덕령의 어이 없는 죽음 - 이몽학의 난
1596년, 지금의 부여땅에서 왕족출신인 이몽학이 뜬금없이 난을 일으킨다. 그는 난을 일으키면서 곽재우, 홍계남, 김덕령 등 당시 명망 높은 의병장들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며 소문을 퍼트렸는데, 당시 도원수 권율이 이를 제압하기 위해 파견된다.
권율은 이때 김덕령에게도 군대를 보내도록 하였는데, 김덕령은 이 명령을 받고 권율에게 향하다가 마침 권율이 있는 곳에 닿기도 전에 이몽학이 크게 패배하여 죽으면서 김덕령은 자신의 군대를 다시 회군하게 된다. 그런데 이몽학이 죽고 난뒤 그가 지니고 있는 문서에서 '김, 최, 홍'이라는 세명의 성씨가 발견되었고 이몽학의 부하를 문초하는 과정에서 '김'이라는 인물이 김덕령을 가리킨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에 이몽학이 죽었다는 소식에 회군을 선택했던 김덕령의 행동에 대한 의심과 모함이 함께 빗발치면서 선조는 즉시 김덕령을 잡아 올리라는 명을 내린다. 이에 김덕령은 선조가 직접 진행하는 친국 자리에서 끝없는 고문을 받게 된다. 그는 6번이나 진행되는 국문에서 전혀 흩어짐 없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으나 결국 장독으로 인해 30살의 나이에 숨을 거둔다.
3.1 사후 평가
김덕령이 죽은 뒤, 아이러니하게도 백성들을 통해 수많은 설화들이 탄생하게 된다. 김덕령의 임진왜란 전과 등과는 별개로 많은 설화와 소설 등이 만들어졌고 그는 억울하게 죽은 충절의 화신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김덕령은 효종 때 억울함을 인정 받아 신원되었고 정조는 김덕령에게 시호를 내리고 김덕령의 설화 등을 모아 <김충정공유사> 등을 편찬하게 했다. 김덕령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져오는 것도 바로 이 책 덕분이다. 여튼 정조대에 이르러 김덕령은 한 명의 영웅으로 추앙 받으며 완벽하게 신원 되게 된다.
김덕령의 임진왜란 전공은 알려진 것처럼 그 명성에 비해 크지 않다. 그럼에도 그가 임진왜란의 대표적인 의병장이라 불리는 것은 그가 보여준 충절과 기개 등이 당시 힘들어하던 백성들에게 큰 귀감이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된다. 이번 영화 <전란>에서도 배우 진선규가 김덕령을 모티브로한 의병장 김자령 역을 맡는다고 하니 어찌 표현될지 기대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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