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조선시대에도 변호사가 있었다? 외지부, 실제 역할과 사건 사례들은 무엇?

윤여시 2024. 11. 4.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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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에 방영되는 드라마 옥씨부인전에서는 조선시대 변호사, '외지부'를 배경으로 한다고 하여 외지부 존재에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도 소송이 있었고 외지부는 백성들이 소송에서 법적 조력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왔던 인물들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실제 존재했던 조선시대 외지부의 역할, 그들이 활동하게 된 배경, 그리고 흥미로운 사건 사례들을 살펴보며 외지부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1. 외지부란 누구인가?

김윤보_형정도첩_외지부
김윤보- 형정도첩 / 소송하는 모습과 판결, 그리고 형벌 등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외지부는 앞서 말한 것처럼 조선시대에 법률 조력을 제공하던 일종의 변호사들이었다. 본래 '외지부'라는 명칭은 원래 관직 명칭에서 유래하였는데, 그뜻은 당시 조정의 공식적 법률 관료가 아닌, 법원 바깥에서 법률 조언을 하거나 소송을 대리하는 인물들을 뜻한다. 말 그대로 바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외지부는 억울한 일을 당한 조선시대 백성들에게는 꼭 필요한 존재들이었다. 소송 서류 작성, 소송 대리 및 증거 수집 등 다양한 법적 지원을 제공했으며, 문서 작성이 필수였던 조선 시대 소송 절차에서 문맹이 다수였던 백성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들이었다. 

그럼에도 외지부는 조선 사회에서 각광 받는 직업은 아니었다. 이들은 정식 관료가 아니었던지라 제도권 밖에 있었고, 때문에 여러 불법적인 행동에 연루되기도 했다. 권력자의 옆에 붙어 소송을 유리하게 하거나, 공문서를 위조하는 등의 문제를 일으키며 당시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다. 조선 조정 역시 이러한 외지부의 불법적 행위를 제재하고자 지속적으로 단속을 시행했다는 실제 역사 기록이 있다.

2. 외지부가 조선시대에 필요했던 이유 

먼저 우리가 놀라워해야 할 부분은 조선에는 명백히 소송제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조선 사회라고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처럼 양반만을 위하는 것만이 아닌 꽤 개방적으로 여성, 노비 등에게도 열려 있었다. 

때문에 조선시대 백성들은 연중 관아에 소장을 제출할 수 있었고, 신분과 성별에 관계없이 소송이 가능했다. 오히려 당시 명나라, 청나라보다 제약 없이 진행되는 소송 제도 들이 존재하였고, 이로 인해 많은 소송이 관아에 집중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늘어나는 소송만큼이나 백성들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일명 조력자들이 필요했고 이로 인해 외지부의 법적 조력이 일반화되고 대중화 된다. 

앞서 간략히 말하긴 했지만 조선의 소송제도는 문서를 통해 진행되었고 여러 절차들이 있었다. 그러나 양반이 아니고서야 문맹이 많았던 백성들에게 이러한 문서들의 작성과 법적 도움을 받는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때문에 외지부가 늘어나는 조선의 소송제도에 발맞추 소송 대리나 문서 작성의 전문가로 활발히 활동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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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외지부의 활동과 문제점 

외지부가 역사속에 등장한 것은 성종때이지만 이미 조선 초기부터 등장해 법적 지원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의 변호사처럼 직업으로서 인정을 받는 직업이 아니라 오히려 조정으로부터 탄압을 받는 불법적인 존재들이었다. 그들을 바라본 기록이 성종실록에 남아 있다. 

모든 소송이 지체되는 것은 오로지 교활한 무리들 때문입니다. '외지부'라 불리는 자들이 늘 관청 문 앞에 서서 원고와 피고를 몰래 사주하거나, 또는 직접 소송을 대신하여 시비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이로 인해 관리들이 시비에 현혹되어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되니, 해당 관서에서 철저히 조사하여 이들을 엄중히 처벌하도록 해주십시오.

-1472년 성종실록-

 

그렇다면 왜 조선 조정은 외지부를 좋지 않게 봤을까? 

 

당시 조선에도 소송과 관련하여 나름 삼심제도가 있었다. 첫 재판관은 당시 마을을 다스리는 군수, 현령, 현감 등이었으며 여기서 만약에 패소할 경우 각 도의 도지사격인 관찰사에게 항소했다. 이마저 패할 경우 중앙의 사헌부까지 올라가는 나름의 삼심 제도가 있었다. 그런데 외지부가 활개를 치면서 소송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하나의 소송이 해결되는 시간도 늘어난다. 거기다 각종 불법적 활동도 성행했는데, 문서를 통한 소송 조작, 뇌물 수여 등의 사회적 문제들이 대두되었다. 

때문에 성종때에 이르러 이 외지부를 공식적으로 불법이라고 명시하였고 만일 외지부 역할을 하다 발각되면 그 가족과 함께 변방으로 쫓아내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조정의 단속을 무시하듯 외지부는 전국 곳곳에서 활동을 하였고 실제 역사속에 외지부와 관련된 기록이 존재한다. 

4. 실제 역사속에 기록된 외지부와 관련된 주요 사건

 

외지부_옥씨부인전
외지부를 배경으로 한 사극 <옥씨부인전>

 

외지부가 관련된 몇 가지 역사속 사례는 그들의 활동이 단순히 법적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넘어, 조선의 사회속에서 꽤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1 외지부 최선석 노비 소송 사건 

조선 효종대에 강원도 홍천에서 활동하던 외지부 최선석은 노비 소송에 개입해 문서를 위조하는 등 다양한 불법적 활동을 벌였다. 그는 자신이 맡은 사건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문서를 조작하여 법정에서 승소를 도모하였고, 이로 인해 함경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최선석의 사례는 외지부가 소송에서 문서의 진위 여부를 조작할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4.2 외지부 채무진 증거 조작 사건

함창군에 거주하던 외지부 채무진은 노비 소유권을 주장하며 법적 분쟁을 일으킨다. 소송에 대해 잘 알고 있던 그는 자신의 노비라 주장하며 조작된 증거를 제출했으나,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패소하게 된다. 이 사건은 당시 외지부가 법적 분쟁에서 문서를 통해 어떻게 이익을 얻으려 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4.3 한양 가택 분쟁 사건 

1661년 한성부의 입안 기록에 따르면, 외지부는 의뢰인의 소송 대리를 하며 송사를 유리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피고 측은 외지부를 고용해 소송을 진행하였고, 원고 측에서 “외지부가 개입해 소송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고 주장한 사례도 있었다. 이는 외지부가 당시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집단이긴 했지만 반대로 그 이미지는 조작 등에 능한 신뢰성을 잃은 집단임을 나타낸 사례이기도 하다. 


 

이밖에도 조선 연산군 때에는 외지부를 신고하면 포상금을 주기도 할만큼 다양한 사례들이 있었고 조정이 나서서 단속했다는 기록도 있을만큼 외지부는 많은 활동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법이 엄격했음을 볼 때, 외지부의 존재 자체가 사라져야 했으나 이들은 많은 백성들의 필요로 인해 살아남았고 조선시대 내내 활동을 해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외지부는 단순히 법적 문제를 해결해주는 조력자에 그치지 않고, 조선시대 법제도와 그 한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인물들다. 이번 드라마 옥씨부인전을 통해 외지부의 역할과 배경이 사용되는만큼 외지부를 알고 흥미롭게 살펴보면 더욱 재미있게 드라마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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