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새해 첫 사극으로 방영될 드라마 <원경>은, 수없이 많은 드라마로 제작된 이방원과 관련된 내용에서 약간 벗어나 그의 아내인 원경왕후에 대하여 조명할 예정이다. 실제 역사속에서 원경왕후는 이방원과 부부 관계를 넘어 정치적 조력자이지만 훗날 비극적인 맞이하게 되는 여인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오늘은 원경왕후와 태종 이방원 관계를 중심으로 실제 역사를 한 번 살펴 보려 한다.
태후이자 세종의 어머니이지만 비극적이었던 삶, 원경왕후 민씨 그녀는 누구인가?
태후이자 세종의 어머니이지만 비극적이었던 삶, 원경왕후 민씨 그녀는 누구인가? 태종 이방원의 부인이자 그를 옆에서 독려하며 왕자의 난을 일으키도록 한 부인 원경왕후 민씨, 그러나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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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인 집안의 아들 이방원, 원경왕후와 만나다
이방원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이성계의 고향이기도 한 지금의 함경도 함흥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10살까지 보낸다. 이후 고려 수도 개성으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교육을 받게 되는데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이성계 가문은 사실 고향인 함흥에서야 명성이 자자하였지만 당시 고려 수도 개성에서는 이성계의 집안을 그리 잘알지 못했고, 이방원의 집안은 이성계를 대표로 전형적인 무관 집안이었던지라 학문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었던 상황이었다.
해서 이성계는 고려의 새로운 세력이었던 신진사대부 정몽주와 같은 유학자들과 함께 친하게 지냈고, 자신의 아들들 역시 훌륭한 문관으로 벼슬길에 오르길 바랬다. 특히 그 중에서도 자신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특유의 영특함으로 공부에 뜻이 있었고 이성계는 그리하여 개성으로 방원을 유학을 보내게 된 것이다.
1.1 이방원 원경왕후를 만나다 - 원경왕후와 이방원 관계
이방원은 영특했다. 그는 개성 바닥에서도 인재로 소문날 정도였고 16세의 나이에 고려 최고의 학문 기관인 성균관에 입학했다. 이는 이성계의 아들 중 유일하였다.
이제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에 맞는 신붓감을 골라야 했다. 자신의 자랑거리인 아들 이방원이 유수의 집안과 결혼하기를 바랬고 이를 통해 이방원을 밀어주려고 했다. 이때 나선 이가 바로 이성계의 둘째 부인 강씨(후에 신덕왕후 강씨, 이방원과 원수가 된다)였다.
애초에 개성에 유학을 온 이방원을 보살피며 교육해온 강씨는 개성의 집안들을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 강씨의 눈에 들어온 집안이 바로 당시 고려 권문세족의 대표 명문가였던 여흥 민씨 가문이었다. 여기에 여흥 민씨 가문의 수장이자 원경왕후의 아버지 민제는 성균관 대사성으로 자리 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고의 이방원의 처갓집이었다.
더군다나 두 집안은 인연도 있었다. 이성계의 넷째 아들 이방간이 다른 여흥 민씨 집안으로 장가를 먼저 갔던 것과 민제의 부인이자 원경왕후의 어머니인 부인 송씨의 외가가 이성계의 부인 강씨의 집안과 같은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앞서 말한 것처럼 이방간의 경우 민씨 집안의 딸과 결혼은 했지만 민제의 딸과 직접 결혼하지는 못했다. 이는 민제가 이방간에게 주기에는 아까웠던 소중한 딸이었기에 거절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방원에게는 선뜻 자신의 18살 둘째 딸을 내줬는데, 당시에는 여성이 15살만 되어도 혼기가 꽉찬것이었음에도 3년이 지나도 혼인을 시키지 않다가 연하인 이방원에게 결혼시킨 것이다. 이는 그동안 마음에 드는 신랑감이 없었으며 이방원이라는 인물이 사윗감으로 등장하자 결혼 시킨 것을 뜻한다.
실제로 민제와 송씨는 후에 원경왕후가 되는 둘째딸을 너무도 아꼈다고 한다. 이는 첫째 딸을 낳은 수 십년이 흐르는 동안 자식을 낳지 못했기 때문인데, 이후 겨우 얻은 딸이었던 것이다. 물론 아들이 아니어서 실망은 했을 수 있지만 원경왕후를 낳고 쭉 이어서 아들 네명을 낳으니 원경왕후는 민제 부부에게 있어서 행운을 가져다 준 인물이었다. 여기에 사내 못지 않게 인품과 총명함이 남달랐다고 전해진다.
더구나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민제의 부인 송씨 집안은 미녀가 많기로 소문난 집안이었고 민제의 집안을 말할 것 없는 당대 최고의 학자 집안이었다. 다시 말해 이러한 유전자를 모두 물려 받은 원경왕후는 당대 사기 캐릭터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변계량의 <헌릉지>에는 원경왕후를 '맑고 아름다우며 총명하고 지혜로웠다'라고 평가하였을 정도였다.
이렇게 18살 원경왕후와 2살 연하 16살 이방원은 결혼을 하며 인연을 맺게 된다.
2. 원경왕후와 여흥민씨 이방원의 열렬한 정치후원자가 되다
이방원은 결혼 후 민제의 집안에서 처가살이를 시작한다. 과거에는 급제했지만 지금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후 대기 시간이 있듯이 이방원 역시 벼슬길에 바로 오르진 않고 처가에 머물며 지낸 것이다.
벼슬길에 오를 때까지 약 4년간의 신혼생활이자 처가 생활은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방원은 결혼 다음해에 원경왕후와 사이에서 첫 딸 정순공주를 얻었고, 장인어른 민제 역시 이방원을 존중하는 의미로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을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표현인 선달로 부르며 존중해줬고 이방원 역시 민제에게 스승이라 부르며 따랐을 정도로 평화로웠다.
이후 22세에 본격적으로 이방원은 벼슬길에 오르는데, 그가 벼슬에 오른지 얼마 지나지 않아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통해 고려 조정의 정권을 잡으면서 이방원과 그의 처가 역시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2.1. 조선의 건국과 이방원의 분노
이방원과 원경왕후는 위화도 회군 이후 처가에서 나와 따로 살았고, 그 후 아버지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트리고 조선을 세우는 과정속에서 정몽주를 죽이고 1392년 조선을 세우는데 있어 이방원과 원경왕후의 처가는 최선을 다해 돕는다.
하지만 조선이 세워지고 이방원은 권력에서 멀어지게 된다. 정국은 정도전과 이성계의 둘째부인 신덕왕후 강씨의 주도로 권력이 재편성된다. 여기에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자 배다른 동생인 방석이 세자까지 차지하게 된다. 이후 조정에서는 왕자들에 대한 견제와 왕권강화를 명목으로 이방원과 다른 왕자들이 가지고 있는 사병까지 모두 해체 당하게 되고 이방원은 결국 권력에 대한 욕심을 접어둔 채 훗날을 도모하게 된다.
2.2. 제 1,2차 왕자의난과 원경왕후의 역할
훗날을 기약하던 이방원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1398년이었다. 방석의 생모이자 후원자인 신덕왕후가 1396년에 죽었고, 1398년 이성계마저 몸져 누우며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1398년 8월 26일, 이성계의 병환이 심각해지면서 이방원을 비롯한 종친과 왕자들이 모두 궁에 모여있었다. 그런데 오후에 이방원의 종 소근이 대궐로 와 방원에게 부인 원경왕후가 갑작스럽게 배가 아프다며 쓰러졌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말을 들은 다른 왕자들이 이방원에게 어서 집으로 가보라고 말한다.
이후 이방원이 자신의 집으로 급히가니 누워 있어야 할 원경왕후는 멀쩡하고 자신의 처남 민무구가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날 이방원과 원경왕후의 동생 민무구를 비롯하여 첫 째 부인의 왕자들은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원경왕후가 이방원을 몰래 핑계로 빼내어 기회를 만들어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원경왕후는 이전에 자신들의 사병들이 모두 해체 당할 때 몰래 빼놓은 병장기를 내어주며 거사를 돕는 역할까지 한다. 거사는 성공했고 세자 방석과 정도전을 제거하며 이방원은 모든 권력을 손에 쥔다. 이것이 제 1차의 왕자의 난이었다.
그러나 이방원은 왕위에 바로 오르지 않고 자신의 둘 째 형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세자 자리에 오른다. 이 역시 원경왕후의 생각과 동일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명분을 쌓은 것이다.
이후 형 방간이 권력을 차지하고자 이방원을 공격한 제 2차 왕자의난까지 잘 막아내고 정종의 선위를 통해 1400년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다.
3. 원경왕후 이방원 관계의 악화
이방원과 온갖 위험속에서도 18년만에 왕후가 된 원경왕후지만 이때부터 왕이 된 이방원과의 사이가 급격히 악화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방원의 권력욕 때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 역사속에는 다양한 이유들이 있다. 살펴보자
3.1. 이방원의 후궁 문제
이 둘이 갈등을 빚은건 권력 차원의 문제가 아닌 여자 문제였다.
사실 왕자 시절에도 이방원은 원경왕후의 몸종에게서 아들을 얻었던 경험이 있었다. 더군다나 이때 원경왕후 뱃속에는 첫째 양녕대군이 있던 상태였다. 원경왕후는 섭섭했지만 당시에는 그저 첩이라 생각했고 이내 몸종과의 관계도 소원해지자 유야무야 갈등은 덮였다.
그런데 이방원은 왕이 되자마자 이번에는 원경왕후 민씨의 시녀에 관심을 갖는다. 특히 이 시녀가 신빈으로 책봉되고 3남 7녀를 얻을 정도로 이방원이 아끼기 시작하면서 원경왕후는 섭섭함이 극에 달했다. 더군다나 이방원이 여러 궁녀들을 탐하기 시작하면서 원경왕후는 이를 참지 못하고 왕과 동침한 여러 궁녀들을 불러 혼을 낸다.
그런데 오히려 이방원은 이러한 원경왕후의 소식을 듣고는 화를 내며 중궁전에서 일하는 시녀와 내시 20명을 내쫒아 버리게 되는데 이때부터 둘의 사이는 완벽히 멀어지게 된다. 이것이 이방원이 왕이 된지 불과 6개월 정도 지난 1401년의 일이었다.
태종은 이후에도 수많은 자신의 후궁을 늘렸고 1402년에 악공 권홍의 딸을 후궁으로 삼자 원경왕후는 마침내 폭발하게 되며 태종을 찾아가 울며 따진다.
"전하께서는 어찌 제가 상감이 어려울 때 함께 했던 일을 잊고 나를 잊음이 어찌 여기까지 왔습니까?"라고 말이다.
이후 원경왕후는 우울증에 빠졌고 태종 역시 정사도 돌보지 않으며 두 부부의 관계는 심각해지게 된다.
원경왕후의 고통이 심해지자 그녀의 아버지이자 태종의 장인어른인 민제 역시 마음 아파해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아끼던 딸의 고통에 괴로워했다. 민제는 임금에게 목숨을 걸고 간언하는 역할인 간관 이지직과 전가식을 불러 태종의 후궁 문제에 대해 비판하는 간언을 올리게 하였고 태종은 화를 참지 못하고 이들을 국문하여 민제가 상소를 올리게 알게 된다.
태종은 화가 났지만 민제의 집을 찾아가 화해를 청했고, 다시 원경왕후와도 짧게나마 좋은 시간을 보낸다. 이후 1404년 원경왕후 민씨의 장남 양녕대군이 세자로 올랐고 성녕대군 역시 태어나며 부부관계는 좋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3.2. 원경왕후 집안 태종에 의해 박살나다
짧은 두 부부의 평화는 얼마 안가 이방원이 아홉명째의 후궁을 맞으며 깨졌다. 이제 태종과 원경왕후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고 태종은 신하들에게 공개적으로 원경왕후를 비판하기도 하는가 하면 원경왕후 역시 태종에게 초심을 잃었다고 비판하였다.
태종의 원경왕후에 대한 분노는 마침내 처가의 권력 때문이라는 것에 생각이 이르게 되었고 외척의 권력에 대해 견제를 할 생각을 갖게 한다. 여기에 1407년 늦은 시각 민무질의 아내 한씨가 몰래 입궁하여 원경왕후를 만난 것을 트집잡아 태종은 민무구와 민무질을 귀양 보내버린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하륜을 비롯한 이방원의 측근들은 외척인 민씨 형제가 지금의 세자 양녕대군과 친하므로 양녕대군이 왕위에 오르면 자신들에게 화가 미칠것을 두려워하여 민씨 형제를 극형에 쳐해달라는 상소를 올리게 된다. 그리고 1408년 자신의 두 아들이 자신의 사위에게 귀양간 상황에서 민제가 숨을 거두며 민씨 집안은 흔들리게 된다.
여기에 민씨 형제와 친했던 정사공신 이무, 조희무, 강사덕 등이 민씨 형제와 은밀히 연락하다 발각되었고 마침내 1409년 태종은 이 일을 계기로 민씨 형제를 제주도로 귀양 보내버린다. 그리고 얼마 후 수많은 신하들이 민씨 형제들을 죽여야 한다는 상소를 받자 태종은 1410년 민무구, 민무질에게 자결을 명한다.
여기서 민씨 집안에 대한 보복은 끝나지 않았는데 1416년 남은 원경왕후의 두 아우 민무휼, 민무회에게도 자결 명을 내리고 그 가족을 변방으로 내쫓으니 원경왕후의 동생 넷이 모두 죽음을 맞이하며 집안은 그야말로 박살이 나게 된다.
4. 원경왕후 죽음
원경왕후의 슬픔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1418년 첫째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폐해지고 우리가 잘 아는 충녕대군(세종)에게 세자에 오른 것이다. 원경왕후는 폐세자 양녕의 목숨만은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이러한 노력 덕분에 양녕대군은 태종에게서 목숨만 부지하여 지금의 경기도 광주로 떠나게 된다.
그리고 충녕이 왕위에 오른지 2년 후인 1420년 원경왕후는 학질에 걸려 56세의 나이에 숨을 거둔다.
이때 태상왕 자리에 있던 태종은 뭐가 못마땅한지 원경왕후의 상을 간소화 하자고 권유하였으나 세종은 이 명령만은 못 받아드리겠다며 원경왕후가 헌릉에 묻힐 때까지 상복을 입었다고 한다.
또한 지금의 서초구에 있는 헌릉에는 태종과 원경왕후가 나란히 묻혀 있는 쌍릉의 형태인데 조선왕릉 중 평풍석과 난간석이 붙어 있는 능은 이것이 유일하다 이는 세종이 두 부부가 하늘에서는 화해하길 바라나는 간절한 마음 때문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까지 원경왕후 실제 역사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이번 드라마 <원경>은 원경왕후와 이방원의 관계를 역사와 상상을 결합한 매력적인 이야기로 전할 것으로 기억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드라마가 어떻게 이 관계를 재구성할지 기대하며, 원경왕후와 태종 이방원의 이야기에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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