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의병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 영화 배경 이몽학의 난 이야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조선의 백성은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비참한 생활을 해야했다. 왕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도망간지 오래고 왜군은 잔인하게 백성을 유린했다. 여기에 최악의 흉년까지 겹치고, 조선을 도우러온 명나라에 군량미까지 바쳐야 하니 조선의 백성들의 삶은 절박함 그 자체였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백성들은 왜군이 아닌 조선 조정을 향해 칼날을 돌리기도 하는데, 오늘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백성의 반란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이몽학의 난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1. 임진왜란 발생과 함께 백성은 무너지다
1) 선조의 도망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이후 부산을 점령한 왜군은 한양을 향해 빠른 속도로 진군한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1592년 4월 29일 신립 장군을 통해 충주 탄금대에서 왜군을 막게 했지만, 처참한 패배를 맛보게 되고 이 소식을 들은 선조는 바로 다음날 한양을 버리고 도망간다. 왕이 도망가니 한강을 지키던 장수들마저 도망가버리니 왜군은 5월 3일 무혈로 한양에 입성한다.
선조가 도망간 궁궐에는 실망한 백성들이 들어와 물건을 가져가고 공사노비 문적들을 불태웠으며 궁궐 방화를 하는 등 민심도 극도로 무너져 간다. 심지어 평양에 들어간 선조를 백성들이 가지말라며 막는 일까지 발생한다.
멍청한 선조는 나라를 버리고 오직 명나라로 도망가 명나라 군대를 데려와야 한다며 외치기 시작했고, 이는 군 사기와 민심의 이반을 불러온다.
2) 흉년과 전염병
임진왜란 이후 1595년까지 약 3년 동안 흉년이 계속된다. 이때 많은 백성들이 이미 먹을 것이 없어 죽어야만 했다. 그런데 1595년에는 다른 해와는 달리 풍년의 해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풍년이 들자 조선 조정에서는 백성을 수탈하여 군량미 등을 보충하는데 노력을 다해 백성들은 흉년과 다름 없는 해를 보내야 한다. 여기에 먹을 것 없는 백성에게 전염병까지 돌면서 조선의 백성은 무너져야만 했다.
2. 이몽학의 난 일어나다
1) 배경
책임지지 않는 선조와 조정, 그리고 잇따른 흉년과 전염병으로 인해 임진왜란 이후 민심은 극도로 무너졌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임진왜란이 발생한지 4년이 지난 1596년에는 조명연합군과 왜군이 강화회담에 들어가며 소강상태에 들어섰지만 여기저기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전투 때문에 백성들은 피해를 입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에 들어온 명나라 군대를 먹이기 위한 군량미 수탈은 물론 왜군을 막는다며 성을 쌓는 노역에 백성들이 차출 되는 등 조정은 백성을 돌보지 않았다. 이에 굶주림에 참을 수 없던 백성들은 도적으로 변해 약탈을 자행했고 조정에 대한 민심은 이제 폭발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2) 이몽학 민란군을 조직하다
이몽학의 난을 주도한 이몽학은 서얼 출신으로 의병장 한현이라는 인물 밑에서 군을 훈련시키는 조련 장관으로 있었다. 그는 지금의 홍성 지역의 무량사에서 군사를 조련하며 동갑계회라는 비밀결사 조직을 통해 인근 지역의 세력을 규합한다.
세력이 점차 커가자 이몽학은 한현과 함께 난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그가 훈련시켰던 군대를 주축으로 서얼, 평민, 양반 일부 등으로 구성된 약 1천명의 군대를 이끌고 거병한다. 한현은 이때 이몽학에게 먼저 거병을 명령한뒤 자신은 훗날 내응하기로 약속한 후 홍성으로 떠난다.
3) 이몽학 충청도를 휩쓸다
이몽학이 거병한 후 지금의 홍성, 청양, 예산 등을 점령하였는데 이몽학의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으면 당시 이 지역을 지키고 있던 관군 대부분이 그대로 도주했다. 이렇게 이몽학의 난이 성공적으로 시작되자 인근의 많은 백성들이 호응하였고 그 군대는 이제 수만명에 달할 정도로 막강해진다. 이에 지금의 부여, 서산까지 무너지며 이몽학은 충청도 일대를 빠르게 장악한다.
4) 이몽학 홍주성에서 패배하다
이몽학은 연전연승을 하자 민란군을 이끌고 홍주성을 공격한다. 그러나 내응하기로 한 한현이 아직 때가 아니라며 홍주성 공격을 멈춰달라고 했지만 연승에 신이난 이몽학은 자신만 믿은채 홍주성을 공격한다.
이때 홍주성을 지키고 있던 홍주목사 홍가신은 다른 지역의 군대와는 달리 도망가지 않고 민병을 모으고 수성 계획을 하나하나 점검했고 자신의 부하 두명을 민란군에 항복시켜 공격을 지연시키는 한 편 성 밖의 민가를 모두 업애 반군의 거점을 사전에 차단한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인근 지역의 현감들이 군을 이끌고 합류하면서 관군의 사기는 올라가고 민란군의 사기는 꺾이게 된다.
이렇게 관군의 조직이 만들어지는 동안 민란군은 전략을 구상할 사람이 없어서 허둥지둥 된다. 이에 이몽학은 홍주성 공격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도망을 가는데, 그러자 강력할 것 같았던 민란군은 서로 앞다투어 도망가기 시작했고 관군까지 추격하면서 이몽학의 난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꺾인다.
이후 관군은 이몽학을 잡기 위해 이몽학의 목을 베는 자는 용서하고 큰 상을 준다고 알렸고, 이몽학의 부하 김경창, 임억명, 태근 등이 막사로 난입하여 이몽학의 목을 베어 관군에 보낸다. 이몽학의 허무한 죽음이었던 것이다. 거사부터 이몽학의 죽음까지 이 모든 일은 단 일주일 동안 일어난 일로 말그대로 짧고 굵게 타오른 반란이었다.
물론, 비록 허무한 실패이긴 했지만 백성을 살피지 않던 조선 조정은 이 반란으로 인해 간담이 서늘해졌을뿐 아니라 반대로 백성들은 힘을 합치면 조정에 대항할 수 있음을 경험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3. 이몽학의 난 이후 포상
이몽학의 난이 얼마나 조선 조정에 위협이 되었는지는 이를 진압한 후 조선 조정이 내린 포상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몽학의 난을 막아낸 홍주성 홍가신 목사는 물론 조금이라도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는데 도움이 된 인물들이 공신에 책봉될 정도였는데, 왜군을 상대로 승전을 거둔 장수들도 공신에는 못오르는 상황에서 이몽학의 난이 얼마나 선조에게 충격적이었는지는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여튼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인물들을 이른바 청난공신이라 불렀는데, 이들의 숫자가 많았기 때문에 신하들은 공신의 남발이 조정의 기강을 무너트리고 공신의 상징성을 없앤다며 반대를 하고 선조와 싸울 정도였다. 그럼에도 선조는 뜻을 굽히지 않고 청난공신들을 모두 임명하니 이몽학의 난이 얼마나 선조에게 큰 상처를 준 사건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겠다.
왜란 이후 피폐해진 백성들이 단순히 도적이 아닌 조선 조정의 전복까지 생각했다는 점에서 이몽학의 난은 그 의미가 있으며 이몽학의 난은 승려, 서얼, 평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급의 사람들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의미를 지닌다. 또한 조정을 위해 싸웠던 주동자 이몽학, 한현 등이 조정을 향해 칼날을 돌린 것은 조선 조정이 얼마나 민심을 잃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일까 이몽학의 난은 나라에 버림받은 비참한 민중들의 목소리와 행동을 담았다는 점에서 영화 <구르믈버서난달처럼럼>, <전란> 등의 배경이 되며 우리에게 지금까지도 전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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