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서른살의 죽음, 대한제국 평민 의병장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24. 8. 6.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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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살의 죽음, 대한제국 평민 의병장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 그는 누구인가?

조선말 대한제국 초, 이른바 구한말에는 우리나라를 둘러싼 열강들의 침략 야욕이 극에 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일제는 노골적으로 우리나라를 식민지 삼고자 하나하나 계획을 이루어가고 있었는데, 나라가 위험할 때 일어나는 것은 결국 백성들이었다. 그리고 이 당시 가장 유명했던 평민 의병장이 있으니 바로 태백산호랑이라 불린 신돌석이다. 그는 누구이며 삶은 어떠했을까?

1. 신돌석의 출생과 성장

신돌석 초상화

 

1878년,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에서 2남 2녀 가운데 태어난 신돌석은 평민 집안으로 양반과는 엄연히 다른 집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신돌석의 자료들을 살펴보면 그의 아버지 신석주가 후에 상당한 의병자금을 제공하고 신돌석이 집안의 재산을 팔아 의병활동에 나섰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 그 지역에서는 부유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신돌석의 이름은 본래 신태호지만 그가 의병생활 내내 초명이었던 신돌석이라 불리며 우리에게는 신돌석으로 알려지게 된다. 신돌석은 어릴 때부터 용맹하고 기골이 장대하며 천하장사라 불렸다고 하는데 목소리도 우렁차서 그야말로 장군감이라 불렸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모습 때문에 마치 홍길동처럼 축지법을 쓰고 산을 탈 때도 남들보다 몇배는 더 빨랐다는 옛날 옛적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그는 앞서말한 것처럼 집안이 상대적으로 부유한 평민이었기 때문에 그래도 양반집에 드나들면서 글공부를 하였는데 그의 스승 역시도 신돌석의 명석함과 그릇을 알아보고 글을 가르쳤다. 

 

또한 그는 지금의 영덕군 고래산에서 무술연마도 했다고 전해지는데 그가 어느날 우연히 얻은 책으로 무술을 시작했다고 전한다. 무협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일이지만 이 이야기는 지금도 영덕 지방의 전설로 내려져 오고 있다. 

여튼 결론적으로 신돌석은 글과 무술 등을 어렸을때부터 갈고 닦은 것으로 보이며 일찍부터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장대한 기상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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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돌석 의병의 길로 들어서다 

1894년 8월 경북 안동에서 일어난 첫 의병을 시작으로 1895년 을미의병, 1896년 병신의병 등으로 이어지며 전국 곳곳에서 의병활동이 일어난다. 일제가 우리나라에 대한 불평등 조약이나 침략의 야욕을 들어낼때마다 의병들이 일어난 것이다.  

2.1 1896년 18살의 나이로 참여한 영해의병  

1896년 신돌석이 살고 있는 영덕에서도 의병은 일어난다. 이곳에 의병조직인 영해의진과 영덕의진이 조직되었는데 이 당시 의병만 하더라도 자신들의 고을은 스스로 지킨다는 의미가 더욱 강했다. 

 

당시 영덕지방의 양반가문 등이 주축이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오늘날 향토예비군을 만들어낸 것인데, 이때 신돌석 역시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여러 전투를 통해 그의 동료들이 죽는 것을 두눈으로 봐야만 했다. 또한 신돌석의 19살 시절 의병참여는 두 가지 만남에 있어서 의미가 있는데 당시 영덕지방의 활약하는 의병들과의 만남이 그 첫번째요. 일본 제국주의의 참혹함을 본 것이 그 두번째였다. 

그가 영해의병을 지휘관으로 참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두만남을 통해 그가 훗날 의병장으로서 살아가게 되는 큰 동기 부여가 되었다.

2.2 신돌석의 숨겨진 6년 

1896년 의병에 참여한 신돌석은 1902년까지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다만 이때 훗날 대한광복회 총사령관이 되는 박상진과 교우를 다지고 당시 일제에 대항하던 여러 민족지도자들과 만났다는 설이 있다. 아무래도 첫 의병활동에서 중과부적으로 한계를 느끼고 답을 찾아가던 신돌석의 시간이 아니 었나싶다. 

이후 1903년, 다시 기록에 등장한 신돌석은 청도 지역을 지나다가 전신주를 세우고 있는 일본군 5명을 마주치자 전신주를 뽑아 이들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고 부산에서는 심지어 일본 배를 전복시키고 일본인들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후 1904년, 다시 기록에 등장하는데 그의 나이 27세에 지금의 울진 월송정에 올라 다음과 같은 시를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그 시는 지금까지도 전한다. 

누각에 오른 나그네, 갈길을 잊고서
폐허가 된 단군의 터전을 한탄하노라 
남아 27세 무엇을 이루었는가
잠시 추풍에 기대니 감개만 이는 구나 

-신돌석-


그의 숨겨진 6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라에 대한 걱정이 극에 달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3. 신돌석 의병의 대장이 되다

신돌석 기념관
지금의 영덕에 위치한 신돌석 생가지 및 기념관 (출처: 영덕문화관광)

 

1906년 신돌석은 마침내 스스로 의병을 조직하고 영릉의진 부대를 만들어 이를 이끄는 의병 대장이 되었다.

 

당시 신돌석이 창립하고 따르던 의병은 100~300명 정도 되었는데, 처음 조직에 이만큼의 지원자들이 모여들었다는 것은 영덕 지역에 있어 신돌석의 영향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그의 휘하부대는 주로 20대 청년들이 많았는데 신돌석은 부대를 창립하자마자 훈련부터 시작한다. 이는 그가 영해의병에서 활동할 당시 훈련도 안된 사람들이 제대로 싸울 수 없다는 점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신돌석은 신분의 높고 낮음 없이 군의 조직개편을 단행했으며 때문에 유생, 양반, 관료(오늘날 주무관 정도) 등도 그의 의병에 포함되어 있었다. 리더십 하나만으로 당시까지도 존재했던 신분의 벽을 넘어선 것이다. 

또한 자금마련을 위해 영덕을 기점으로 이곳저곳을 이동하며 군자금을 모집하고 병력들을 모았으며 영양과 청송관아를 습격하여 총기와 화약을 비롯해 군 유지를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3.1 신돌석과 영릉의병의 활약

1906년 5월, 신돌석의 영릉의병 부대가 성장하면서 그들의 첫번째 목표가 정해진다. 바로 울진이었다. 울진은 당시 일본이 우리나라의 침탈을 위한 거점 중 하나로 신돌석은 울진의 공격을 통해 일제에 두려움을 주고자 했다. 영릉의진은 김하규가 이끄는 삼척의진과 협공 하면서 울진과 삼척 전역에 공격을 감행한다. 또한 자신의 고향인 영해와 영덕 등을 공격하기도 한다.

이를통해 신돌석은 일본군의 편에 선 당시 군수들을 질책하고 일제와 연관 있는 관공서들을 습격하였으며 당시 어업 침략에 참여하던 일본의 어업인들과 수산업자들을 공격하면서 일본인들의 무자비한 이주를 막으려 했다.

3.2 토벌대가 파견되다 

신돌석의 부대가 영덕, 삼척 지방을 휩쓸고 전국적으로 의병부대가 일어나면서 1906년 6월, 일제 통감부는 조선 조정에 의병 진압을 요구한다. 이에 당시 대한제국 고종은 의병활동을 중지하라는 명을 내렸지만 의병들은 협박당한 황제에 대한 분노로 더욱더 들불같이 일어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대구의 조선 통감부의 병력과 조선 관군은 진압군을 구성하여 일부를 영덕 방면으로 향한다. 전후좌우를 포위했지만 신돌석의 부대는 이를 잘 극복한다. 오히려 기세를 몰아 다시 울진을 위협할 정도였다. 그러자 일제는 더 많은 토벌군을 보내었고 때마침 농번기와 맞물리면서 일부 의병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신돌석과 부대 일부는 태백산맥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시작한다.

그러자 토벌대는 신돌석의 고향 마을의 집을 불태우고 부하들을 잡아 사형에 처하는 등 강도 높은 탄압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후에도 신돌석 부대의 사기는 꺾이지 않고 해가 넘어가 1907년까지 유격전을 통해 지금의 동해안 지역 곳곳을 돌며 유격전을 이어간다.

3.3 신돌석 부대의 위기 

1907년 8월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을 일제가 명령하고 전국의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위해 병력을 파견한다. 그러자 이를 반대하는 군인들과의 산발적인 교전이 벌어지고 일부는 의병과 합세하였는데 신돌석의 부대 역시 영양 영덕과 삼척을 공격하여 무기를 빼았고 관아 등을 불태운다. 신돌석의 부대는 그야말로 신출귀몰하며 소규모 부대를 활용하여 일제의 추적을 따돌리고 또 어느 순간 나타나 공격을 감행하는 등 활약을 하고 있었다. 

더이상 참을 수 없던 일제는 이제 작은 토벌대로는 의병들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1907년 9월, 마침내 대규모의 토벌대를 구성한다. 이로 인해 큰 피해를 입기도 했으나 신돌석은 이번에는 봉화 지역에 나타나 공격을 하며 일제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1907년 후반부터 1908년까지 2년에 걸쳐 일제의 1,2,3차 토벌대로 인해 신돌석의 부대 역시 피해를 입고 활동반경은 줄어들수 밖에 없었으며 일본군이 주요 거점에 주둔을 시작하며 게릴라전도 힘들어진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귀순자면죄조칙을 발표하여 의병들에게 항복을 하면 면죄부를 주겠다는 법을 공표하고 의병들을 회유하면서 신돌석 의병 부대에도 투항자가 속출하기 시작한다. 

- 13도 창의군 대장에 천거

1907년 11월 신돌석은 전국 13도의 의병연합인 이른바 13도 창의군의 대장으로 천거된다. 13도 창의군은 의병부대를 모두 모아 사령부를 창설하고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여 서울로 진격하자는 계획을 세웠는데 전국의 의병대장들은 이 같은 계획에 동조하며 양주에서 회의를 가졌고 의병부대 총재당으로 이인영을 추대한다. 이때 도별로 의병장이 천거 되는데 경상도 대표가 바로 신돌석이였다. 

하지만 한 달뒤 신돌석 대신 다른 인물로 교체되었는데 이는 이인영이 평민 출신인 신돌석을 차별하여 바꾼 것이라는 설과 신돌석이 양주에 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4.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의 안타까운 죽음

일제는 이른바 신돌석생포작전을 진행하면서 집요하게 신돌석 부대를 추적하였고 신돌석의 부인 한씨를 이용해 회유까지 할 정도가 되자 항전이 점차 어렵게 된다. 더군다나 부하들마저 한명 두명 떠나면서 신돌석은 우리나라에서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만주행을 결심한다.

그는 만주로 떠나고자 이동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고자 하였고, 1908년 12월 11일 9시 지금의 영덕군 눌곡리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4시간만인 새벽 1시에 그는 주검으로 발견된다. 그가 왜 죽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두가지 설이 있다. 

첫번째 기록은 의병 동지들의 기록으로 신돌석이 김상렬, 상태, 상호 3형제에게 살해되었다는 기록으로 그들은 신돌석과는 먼친척인데 이들이 신돌석에게 걸린 현상금을 노리고 술이나 약을 활용해 신돌석이 잠이 든 새 죽였다고 기록되었다. 

두번째 기록은 일본측의 기록으로 신돌석의 부하였다가 귀순한 김도윤과 김도룡 형제가 다시 그들을 포섭하려는 신돌석과 언쟁이 붙어 기습하여 살해했다는 내용이다. 

구한말 태백산 호랑이라 불렸던 청년 의병장의 죽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허무한 기록이었다.  


신돌석의 시신은 가족에게 인계되었고 신돌석이 태어난 마을 뒷산에 묻혀있다가 1963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추서가 되었고 1971년 서울 현충원으로 이장되어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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