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장자였지만, 그 성격으로 왕이 되지 못한 임해군,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24. 6. 1.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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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였지만, 그 성격으로 왕이 되지 못한 임해군, 그는 누구인가?

조선시대 왕실에서 장자라는 자리는 곧 다음 후계를 의미했다. 그런데 장자였음에도 논란 하나 없이 후계 자리를 동생에게 빼앗긴 인물이 있다. 바로 임해군이다. 성격이 잔혹하고 포악해 일찍부터 후계 자리에서 쫓겨나야 했던 왕자 임해군 그는 과연 누구일까? 

 

임해군
드라마 <불의여신정이>에서 임해군 역의 이광

 

1. 임해군의 출생과 어린시절 

임해군은 1574년 선조 7년, 선조와 공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서장자이다. 장자면 장자지 앞에 서가 붙는 이유는 공빈 김씨가 선조의 정실 부인이 아닌 숙의 신분이었기 때문이여, 당시 중전이었던 의인왕후 박씨는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임해군이 명실공히 서장자가 된 것이다. 즉 왕위에 가장 가까운 왕자였다. 

그러나 일찍부터 그의 성격이 난폭하고 도저히 왕이 될 싹을 보이지 못했으므로 그 입지가 점차 줄어들었고 반대로 그 동생 광해군은 왕의 재목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선조뿐 아니라 조선의 신하들도 광해군이 왕위를 물려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형보다 나은 아우가 있었던 것...

 

알다시피 장자를 배척한다는 것은 당시 유교 꼰대들에게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얼마나 막장이었으면 이를 반대하는 신하가 없었다고 하니 놀라울 일이다. 

 

2. 임진왜란이 발발하다

임해군의 나이가 18세가 될 무렵,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왜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면서 비겁한 왕 선조는 의주 땅으로 피난을 가고 자신 대신 싸워줄 일시적인 왕의 권한을 세자가 물려 받아야 했다. 해서 선조는 싹이 노란 임해군 대신 광해군에게 임진왜란을 수습하도록 하면서 세자자리는 광해군이 오르게 된다. 여기에 더해 광해군으로 하여금 임시로 세운 왕조인 분조를 끌게하여 사실상 왕권을 넘겨준다. 

그리고 선조는 임해군과 그 이복동생 순화군으로 하여금 함경도로 파견하여 군사를 모으는 임무를 맡긴다. 그러나 임해군과 순화군은 하필 조선 역사상 최악의 성품을 가진 왕자들로서 전쟁을 수습하기는 커녕 놀고 먹고 마시면서 안그래도 힘든 백성들과 관리들을 괴롭힌다. 

얼마나 잔인하게 백성들을 괴롭혔으면, 이를 참지 못한 조선의 백성이었던 국경인, 국세필 등이 당시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와 짜고 임해군과 순화군을 붙잡아 넘겨버린다. 쉽게 말해, 그 성품이 패악하기 이를데 없는 왕자 두 명을 백성이 참을 수 없어 적에게 넘기는 반역을 해버린 것이다.

- 임해군의 포로생활 

적에게 붙잡힌 것도 아니고 전란중에 백성이 반란을 일으켜서 적군에게 보내버릴 정도면, 그에 대한 인심이 얼마나 나락인지 이해가간다. 그러나 임해군은 이를 곱게 받아들일 인물감이 안되었다. 임해군은 감히 자신을 팔아버린 백성에 대한 분노가 심해졌고 실제로 10개월의 포로생활 이후 풀려나서는 더 망나니 같은 행동을 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선조실록>, 왜군 가토기요마사의 기록이 둘다 임해군을 잘 대해줬다고 하는데, 이는 왜군은 나름대로 임해군을 쓸만한 카드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포로생활이 그렇게 힘들지도 않았는데 임해군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지 못하고 망나니가 된 것이다. 

 

여튼 임해군은 당시 왜군의 좋은 포로 카드로써 조선은 안그래도 힘든 전쟁을 치루면서 임해군을 협상 끝에 겨우 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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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징비록>에서 임해군

 

3. 임해군 망나니가 되다 

세자자리도 빼앗기고 임진왜란에 포로 생활까지 했던 임해군은 더 악에 바쳤는지 기록에 따르면 망나니 같은 패악질을 일삼았다고 전한다. 폭행은 물론 강도, 재산 강탈들을 일삼았으며 불량배들과 어울리며 백성들을 괴롭혔다. 또한 오늘날 대통령 비서실장급의 도승지 유희서의 첩을 빼앗기 위해 유희서를 살해하는 행동까지 일삼게 된다. 

이러한 임해군의 폐급 행동에 선조는 분노를 하였지만 행동은 이와 반대 우습게도 아들이라고 큰 벌을 내리지 못한다. 오히려 피해자를 처벌하는 명을 내려 선조 역시 당시 사관들에게까 많이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광해군에 대한 임해군의 분노 

임해군은 양아치 생활을 하더라도 자신은 왕이 되어야 하는 존재라고 여기저기 말을 하고 다녔다. 임해군은 왕위 계승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고 동생 광해군에게 빼앗긴 것에 대한 분노만을 품고 있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과정에서 17살의 나이에 전란의 뒷수습과 함께 전쟁을 승리로 가져가기 위한 리더십을 보여주었던 인물이다. 모자란 왕이자 자신의 아버지 선조 대신 나라를 이끌어낸 것이다. 이것만 봐도 광해군은 임해군과는 차원이 다른 명군감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임해군은 자신의 동생 광해군 탓만 하면서 패악질을 일삼는다. 때문에 광해군 역시 모자란 자신의 형을 정말 싫어했다고 한다.

4. 임해군 귀양가다 

1608년 마침내 선조가 죽자, 임해군의 유일한 보호막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거의 모든 신하들이 들고 일어나 임해군의 처벌을 요청한다. 마치 지금으로 따지면 진보, 보수 두 정당이 모두 동일한 목소리를 내는 기적인 것인데 광해군역시 임해군의 처벌을 반대하는 것 같았으나 신하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자 임해군을 교동도로 유배 보낸다. 

그런데 때마침 명나라에서 왕위 계승에 문제를 제기한다. 내용은 장자인 임해군 대신 동생인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것에 대한 의문이었다. 이에 조선에서는 급하게 임해군의 건강, 정신문제를 제기하였고 명나라는 수상하게 여겨 사신을 보내 알아보도록 한다. 광해군은 급하게 귀양간 임해군을 불러오게 한다음 외숙부 김예직을 보내 임해군에게 명나라 사신에게 할 태도와 말을 모범답안으로 전하게 한다. 

임해군은 자신의 죄가 없다며 억울해하면서도 명나라 사신을 만나 아픈척 연기를 한다. 이후 명나라 사신들은 의심을 하였지만 광해군은 뇌물을 주고 명나라에 가서 보고하게끔 한다. 

5. 임해군의 의문사 

임해군은 명나라 사신을 만나고 다시 교동도로 귀양을 떠나 얼마안가 의문사를 당한다. 임해군의 죽음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당시 교통 별장 이정표라는 인물이 자신의 관비를 통해 독살하려 했으나 관비가 이를 거부하면서 직접 자신이 목을 졸라 죽였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이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인조 시대의 조사로 밝혀진 것인만큼 그 사인이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제대로 알 수 없는 것, 여튼 인조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된 왕이기 때문에 광해군이 임해군을 죽였다는 죄를 부각하려 했고 임해군을 복권 해주기까지 한다. 그의 능은 남양주에 위치하며 광해군의 묘 900m 거리에 위치해있다.


왕이 될 사람이었지만 왕이 되지 못한 인물 임해군,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장자라는 특권을 하나도 사용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때문에 역사의 기록보다도 훨씬더 최악의 인물이었던 듯 싶다. 뭐 그 덕분에 광해군이라는 역사가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왕이 등장하긴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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