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천재 과학자 장영실조선의 천재 과학자 장영실

Posted at 2015. 1. 21. 23:20 | Posted in 국사/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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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천재 과학자 장영실


어린아이들에게 꿈을 물어보면 10명중에 2명 정도는 과학자가 되겠다고 말할 정도로 과학자는 예나 지금이나 촉망받는 장래희망 중 하나다. 새로운 것을 끊임 없이 탐구하고 더 나은 것을 만들어내며 인류가 발전하는데 절대 없어서는 안될 직업중 하나인 과학자..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역시 많은 과학자들이 있어 왔는데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과학자라 불리는 한명이 있으니 그가 바로 장영실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



|장영실의 어린시절


조선왕조실록의 이야기만 따르자면 장영실은 그 어머니가 기녀이고 그 아버지는 지금의 소주와 항주에서 건너온 중국의 유민이라고 전해진다. 장영실은 미천한 신분으로 인해 그의 유년시절이나 성장과정에 있어서 기록을 찾을 수 없고 때문에 그가 언제 출생했는지 언제 죽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아산 장씨의 족보에 따르면 장영실의 아버지는 장성휘로 그의 가문 자체가 중국 송나라 때 넘어와 정착하며 살았던 가문이었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장영실이 관노의 신분까지 추락한 것에 대해서는 그 아버지 장성휘가 고려가 몰락하고 조선이 세워질 때 역적 가문으로 몰려 어머니가 관노가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실제 가문 족보에서 내려오는 항렬인 장영실의 '영'이 맞으면서 이를 뒷받침하기도 한다.


두가지 기록 중 어떤 것이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장영실은 노비라는 신분이었다는 것이고 동래에서 어린시절을 관노로 보냈다 것이었다. 그렇지만 장영실은 어렸을 적부터 그 손재주가 뛰어나고 도구를 만들어내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엄격한 신분 사회에서 지금의 부산 동래의 관노였던 장영실의 소식이 세종이 있던 궁에까지 들려 그가 궁으로가 관직을 받은 것이 이를 뒷받침 하는 증거다.


장영실이 동래에서 관노로 있던 시절 장영실은 어렸을적부터 연장을 고치거나 농기구를 만드는데 큰 재능을 보여 이미 동래에서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던 어느날 영남지역에 가뭄이 들면서 고을 전체가 시름에 빠졌는데 이를 지켜본 장영실이 낮은지형의 물을 논이 있는 높은지형에 끌어올리기 위해 물레방아에서 착안한 기구를 만들어내 가뭄을 해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KBS 사극 <대왕세종>에서 장영실 역을 맡은

이천희



|장영실 세종대왕을 만나다


장영실이 태종때부터 궁중기술자로 있었다는 기록도 있고 세종이 발탁해서 관직을 받고 궁으로 들어왔다는 기록도 있지만 장영실이 두각을 나타낸것은 어쨌든 세종대왕때부터였다. 세종대왕은 많은 사람이 알다시피 신분의 높고낮음을 신경쓰지 않고 나라의 인재를 끌어오는 정책을 폈는데 바로 이때 동래 관찰사가 장영실을 천거하여 노비 장영실은 꿈도 꾸지 못했던 세종대왕을 만나게 된다.


장영실을 만난 세종대왕은 여러 일들을 통해 장영실의 재능을 인정하게 되고 1421년(세종3년) 최천구,윤사웅과 함께 장영실을 명나라로 유학보내 천문기구들을 살펴보고 돌아오게 했다. 세종대왕은 그런 장영실을 더욱 아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에게 상의원 별좌라는 관직을 내리는데 여기서 상의원은 임금의 의복 및 궁중의 일용품을 담당하는 관청이었고 장영실은 이때 노비신분에서 비로소 해방된다. <영화 상의원 역시 이 관청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일> 



 


장영실이 가장 처음 만든

천체를 살펴보는 기구 간의대




1432년(세종14) 세종대왕은 공조판서 이천에게 명을 내려 장영실과 함께 우리나라의 천문을 살피기 위한 간의를 만들라 명하는데 장영실은 당시 이미 간의를 만들어내고 있던 명나라와 그곳에 있던 아라비아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아주 작은 자료를 통하여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간의를 만들어낸다. <원래는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위치하던 간의대는 임진왜란 때 불탔으며 지금은 후에 만들어진 창경궁 간의대가 남아있다.>





간의대 제작 바로 이듬해 장영실이 만들어낸

천문시계 혼천의

 



장영실은 간의를 만들어낸 것에 멈추지 않고 이듬해인 1433년 정초, 박연 등과 함께 간의를 바탕으로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관측하는 혼천의를 만들어내는데 이는 조선시대 천문학의 기본이 되는 천문시계가 만들어졌다는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혼천의의 발명 이후 세종대왕은 장영실을 더 믿고 의지했으며 장영실 역시 세종대왕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충성과 노력을 다했다.



 


장영실이 세종의 명을 받아 만들었다 전해지는 갑인자 



고려시대 이미 우리나라는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들어냈고(흔히 구텐베르크가 세계최초로 만들었다고 말하나 고려시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금속활자를 활용한 노하우는 조선 세종때도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활자의 크기가 일정하지 못해 책을 만들어내는데 문제가 있었고 시간도 많이 걸렸는데 책과 학문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세종대왕은 활자에 대한 아쉬움이 누구보다도 컸을 것이다. 해서 세종대왕은 다시 이천에게 명해 기존에 있던 계미자를 보완한 새 활자를 만들도록 했는데 이천과 장영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해서 선명하고 깔끔한 활자인 '갑인자'를 만들어 낸다. 


이 갑인자만 하더라도 구텐베르크가 개발한 것보다 무려 16년이나 앞선 것으로 그 선명함과 뚜렷함 역시 당시에 만들어진 활자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수준의 높은 수준을 자랑했다. 이때가 1434년이었다.





장영실의 자랑 물시계

자격루의 개발



당시만 하더라도 일반 백성들은 물론이거니와 왕실에서도 시간을 안다는 것은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에 일상생활에 있어 많은 불편함이 있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시간을 알기 위해 해와 별등을 관찰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고 이마저도 정확하지 않았다. 오래전 이미 중국에서는 각루(커다란 항아리에 작은 구멍을 뚫어 놓고 그 항아리에 물을 부으면 구멍을 통하여 물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게 되는데 이것을 다른 항아리에 받아 그 양을 재어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는 물시계, 일종의 모래시계 비슷하다.)라고 불리는 물시계로 시간을 재고 있긴 했지만 항아리에 물이 바닥 날때 물을 부어야 하고 사람이 늘 각루 주위에 있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또한 매시간 일일이 종을 쳐서 시간을 알려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래서 1091년 송나라에서는 소송이라는 사람이 물레바퀴에 의해 자동으로 움직이는 물시계를 개발했으나 그 모양과 장치가 너무나 복잡하고 정밀해서 소송이 죽은 후로 아무도 만들어내지 못했으며 200년후인 1300년 아라비아에서도 역시 자동 물시계가 만들어져 쇠로 만든 공이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떨어지면서 북을 치며 시간을 알려 비교적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있었긴 했지만 우리나라와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자동물시계를 꼭 만들어 시간을 알고 싶어 했는데 세종의 마음을 알게된 장영실은 물시계를 만들려고 연구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 집현전 학사로 있던 김빈이 명나라에 들어와 있는 아라비아사람들에게 자료를 구해오며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고 장영실이 이를 참조하여 설계도를 만들어 나갔는데 중간에 혼천의와 갑인자를 만드는 동안에도 장영실은 물시계에 대한 생각을 계속하며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이후 장영실은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드디어 자동 물시계를 만들어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조선 최초의 자동물시계 '자격루'다. 이것이 1434년 6월의 일이었고 한달 뒤 세종대왕은 이 자격루의 시간을 전국의 표준시간으로 정할 정도로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세종대왕은 이때 장영실에게 정4품 벼슬인 호군을 내리게 되는데 그의 출생신분을 놓고 반대하는 신하들이 많았지만 세종대왕은 이에 개의치 않고 장영실에게 호군의 관직을 내린다.



 


해시계 앙부일구



휴대용 시계 현주일구



자격루를 만든 장영실은 기벘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장영실은 자격루가 설치하기가 힘들고 오랜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백성들이 접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타까워 했기 때문에 좀더 설치가 쉽고 간편한 해시계인 앙부일구를 개발하여 종묘남쪽과 혜정교라는 다리 옆에 설치하여 백성들이 시간을 확인 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장영실은 이에 멈추지 않고 백성들이 시간을 알려면 꼭 앙부일구를 찾아가야 한다는 불편함 마저도 없애기 위해 작은 휴대용 시계인 현주일구라는 해시계를 만들었다. 또한 장영실은 발명에 발명을 거듭하여 더욱 발전된 정남일구, 낮과 밤의 시간을 재는 기구인 '일성정시의', 태양의 고도와 출몰을 보는 '규표'등도 만들어냈다.


또한 장영실은 1438년 혼천의와 자격루를 합하여 두 기능을 한번에 발휘하는 옥루를 만들었는데 옥루를 통해서 계절의 변화를 알 수 있게 하였고 인형으로 만든 옥녀들을 옥루에 설치해 시간이 되면 방울을 흔들어 시간을 알 수 있도록하는 아름다움까지 갖춘 그야말로 당시에 보여줄 수 있는 기술을 모두 갖춘 최첨단 기구를 완성시켰다.




 

장영실 측우기를 만들다!




1441년 장영실은 평소 광물 자원의 귀중함을 알았기 때문에 경상도 문경에 자청해서 내려가 광물을 캐내어 제련 하는 일을 감독하는 채방별감을 맡고 있었는데 세종대왕은 그런 장영실을 궁으로 불러 가뭄과 홍수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비의 양을 측정하는 기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세종대왕의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과 지혜에 탄복한 장영실은 곧바로 비의 양을 재는 기구 제작에 들어가게 되는데 기구 제작에 앞서 고민하던 장영실은 비가 올때 우연히 빈 여물통에 비가 고인것을 보고 그 양을 재다가 아이디어를 얻어 구리로 원통모양의 그릇을 만드니 그것이 바로 측우기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장영실이 만든 것은 세계 최초의 측우기로 이탈리아 과학자 카스텔리가 1639년 최초로 만든 축우기보다 200년이 빨랐던 놀라운 업적이다.)  


장영실은 이후 측우기뿐 아니라 하천의 깊이를 재기 위해 다리에 물의 높이를 재는 수표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청계천의 '수표교'다.





장영실에게는 너무나 가혹했던 실수

 


이렇게 수많은 업적을 세우고 세종대왕의 신임을 한몸에 받던 장영실은 신분사회에서 노비가 오르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대호군 자리에 올랐다. 그러던 1442년 장영실은 세종대왕이 탈 가마를 만드는 일에 참여 했는데 그가 직접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 감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가마가 세종대왕이 타자 부서져 버렸고 세종대왕은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지만 조정은 장영실에게 화살을 돌려 몰아 붙이기 시작한다. 


장영실은 결국 벌떼 같이 일어난 조정의 여론에 밀려 곤장 80대를 맏고 감옥에 갇혀 버렸는데 세종대왕 역시 아쉽게도 장영실의 죄를 벗져주지 못해 100대의 곤장형을 80대로 줄이는 최소한의 노력 밖에 하지 못한다. 그리고 허무하게도 이 기록을 끝으로 장영실에 대한 기록은 더이상 남아있지 않으며 그가 언제 죽었는지 전혀 알수가 없다. 


그어느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강한 신분사회에서 노비였지만 그 재능을 인정 받아 부산에서 서울까지 올라와 임금이 있는 궁까지 들어갔고 벼슬까지 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세계 과학을 앞서가는 여러 과학기구를 만들어냈다... 한편의 영화 같은 삶을 살았던 장영실... 그래서 그가 어디서 어떻게 언제 태어났는지 그리고 어떻게 죽었는지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것이 더 안타깝게 느껴진다.. 이번 KBS1 사극 <징비록> 후속작으로 사극 장영실을 방영한다고 하는데.. 그의 역사적 재조명을 기대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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