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선봉장 소서행장 고니시 유키나가임진왜란의 선봉장 소서행장 고니시 유키나가

Posted at 2015. 2. 6. 23:27 | Posted in 세계사/동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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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


조선의 역사를 전후로 나눈 7년전쟁 임진왜란... 그리고 이 참혹했던 임진왜란의 일본 선봉장으로 평양까지 아무도 막을자 없이 진격했던 당시 일본의 손꼽히는 명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있다. 우리말로 소서행장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고니시 유키나가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고니시유키나가


KBS1 드라마 <징비록> 고니시유키나가역의 이광기


 

|출생과 성장


고니시유키나가의 출생년도는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대략 1558년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고니시유키나가의 집안은 그 아버지 고니시 류사가 약재 무역상을 하며 명나라를 드나들었기 때문에 꽤 부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 아버지 고니시 류사는 명나라를 왔다갔다하다 당시 서양문물을 접하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명나라에 들어와 있던 선교사를 통해 천주교 신자가 되어 세례까지 받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때문에 그의 아들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 역시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받을 정도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여튼 이러한 무역기반을 바탕으로 처음에는 외교역할을 하며 우키타 나오이에의 가신으로 있었으나 우키타 나오이에가 오다 노부다가에 항복할때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 인연을 처음 맺게 된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 된 고니시유키나가는 히데요시의 신임을 얻고 수군을 통솔하는 중요한 자리까지 오르게된다. 





KBS1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소서행장

 


|임진왜란 직전! 그의 라이벌 가토 기요마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한 후 전국의 퍼져 있는 다이묘들을 견제 하기 위해 자신이 신임하던 신하들을 뿌려 이를 통제하게 했는데 고니시유키나가와 가토기요마사 역시 이 같은 명령을 받고 규슈지방에 영지를 부여 받는다. 특히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의 영토가 남북으로 붙어 있어서 트러블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특히 불교 신자였던 가토 기요마사가 자신의 영지에 있는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하면서 고니시 유키나가 영지로 신자들이 피신해 왔고 이 사실을 안 고니시가 항의하면서 가토와 다툰적이 있었다.


또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처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벌이겠다는 전쟁론을 듣고 반대했지만 가토 기요마사는 이에 적극 찬성하면서 트러블이 생기기도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고니시 유키나가가 제 1선봉장이 되고 가토 기요마사가 2선봉장이 되어 임진왜란의 서막을 알리게 된다.





소서행장 모습

 


|임진왜란의 선봉장으로


드디어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받고 자신의 사위인 대마도 성주 소요시토시와 함께 18,0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부산성과 동래성으로 밀어닥친 고니시 유키나가는 두 성을 함락하고 파죽지세로 선조가 있는 한양으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전쟁을 반대했음에도 1선봉장으로 조선을 침공한 것을 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를 얼마나 믿었는지 알 수 있다.)


사실 가토기요마사가 함경도로 진군하여 큰 전쟁을 치루지 않고 승리한 것에 비해 고니시 유키나가는 한양으로 진군하며 조선과의 전쟁을 계속 승리로 이끌었고 한양에 이어 평양까지 점령한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하지만 고니시 유키나가가 평양을 점령한 이후 남해에서의 이순신 장군의 활약과 의병의 활약, 명나라 대군의 지원이 이어지면서 평양성에서 더이상 진군을 하지는 못한다. 이후 명나라 지원군에게 패하면서 평양성에 불을 지르고 후퇴를 했고 권율의 행주산성에서도 패하며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특히 이때부터 전쟁이 장기화 될 조짐을 보이자 고니시유키나가는 자신의 탁월한 능력중 하나인 외교능력을 발휘하여 조선, 명나라와 끊임 없는 강화요청을 하고 외교 능력으로 전쟁을 끝마치려 했는데 이를 두고 가토 기요마사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싸우지 않으려 한다며 비난을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고니시 유키나가는 늘어지는 전쟁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고 명나라의 심유경을 만나 일본의 요구조건(조선의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를 갖는 조건, 명나라의 공주를 일본에 시집 보내는 등) 을 전했고 이 같은 요구조건으로 외교가 절대 될 수 없음을 판단, 명나라 신하 심유경과 회의 내용을 조작하여 보고 하였다가 발각 되어 심유경은 명나라에서 죽음을 맞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그 동안의 공을 인정받아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겨우 살아남는다. 


(고니시유키나가는 임진왜란 동안 눈에 띌 정도로 큰 칼을 휘둘렀다고 하는데, 적병들이 두려움에 떨었다고 전해지며 그의 진영은 항상 군기로 하얀색 십자가를 그렸고 그가 이끄는 병사들도 다수가 천주교 신도였으며 전쟁중에도 포르투갈 출신의 천주교 세스페데스 신부를 통해 미사를 올렸다고 한다.)



 




|정유재란 그리고 최후 


협정이 실패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시 한 번 병력을 보내니 이것이 바로 1597년의 정유재란이다. 이번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제 1군으로 고니시 유키나가가 2군으로 출전을 하게 되는데 전주와 남원을 함락하였다가 이듬해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후퇴를 결심하고 명나라 수군총독 진린에게 뇌물을 바쳐 겨우 목숨만 부지해서 일본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일본 본토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문치파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단파 사이의 갈등이 심화 되었고 이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밑으로 들어가 있던 가토 기요마사가 미쓰나리를 공격하면서 1600년 이 둘의 모든 것을 건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진다. 이때 고니시유키나가는 히데요시가의 충성하며 이시다 미쓰나리 편에서 전쟁을 벌였는데고니시유키나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농성작전을 주장하였으나 미쓰나리가 이를 거부하고 강하게 부딪히면서 전쟁에서 완패했다.


이후 고니시유키나가는 자살을 금지하는 천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일본 전통인 할복 자결을 하지 않고 참수 된다. 이후 고니시유키나가 가문은 완전히 멸문지화를 겪었으며 그가 가지고 있던 영지는 모두 가토기요마사가 가져갔으며 이후 천주교에 대한 강력한 탄압을 실시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흔치 않았던 천주교신자라는 점, 빠른 상황판단과 외교력으로 두각을 나타냈다는 점 외에도 나름 생각이 깊고 충성심이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당시 조선에는 큰 적이었지만 일본 장군 중에서는 영웅중에 영웅으로 꼽히는 인물이 아닐까 싶다 이번 징비록에서 이광기가 고니시유키나가 역을 맡는다고 하니 그 연기 기대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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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일본소설 대망에서 고니시가 줄을 잘못서서 도쿠카와이에야스에게 형장에서 참수당하는 장면이 있는데 참으로 고소하고 통쾌하더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주나쁜놈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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