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동양

무식한 청나라 장수? 알고보면 명장인 청나라 용골대 그는 과연 누구일까?

윤여시 2024. 2. 24.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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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한 청나라 장수? 알고보면 명장인 청나라 용골대 그는 과연 누구일까?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꼭 등장하는 청나라의 악역이 바로 장수 용골대이다. 병자호란의 선봉장으로 우리의 역사에서는 무지막지하며 무식한 인물로 등장하지만 그에 대해서 알고보면 사실 전쟁뿐 아니라 정치가로서도 재평가해볼만 한 인물이긴 하다. 물론 우리 역사에서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남긴 인물이긴 하지만 말이다. 청나라 용골대 그는 과연 누구일까? 

드라마 연인 용골대
드라마 연인 용골대

1. 청나라 장수 용골대의 등장 

용골대는 조선식 한자 표현으로 우리 발음이지만 그의 이름은 타타라 잉굴다이이다. 그는 만주족의 귀족 가문중 한 사람으로 그의 집안은 지금의 랴오닝성(요동과 요서지역) 푸순에 살고 있었는데 용골대의 할아버지가 당시 세력을 키워가던 만주족의 대세, 누르하치에게 몸을 맡기면서 자연스럽게 누르하치의 관직에 오르게 된다. 

청년시절부터 용맹하였으며 누르하치를 따라다니며 다양한 전투에서 공을 세워 일찍부터 장수로 승진하였다고 전해진다. 

2. 용골대의 조선 침략

- 조선과의 외교 대사로서 노력

우리가 쉽게 기억하기 힘든 청나라 장수 용골대를 기억하는 이유는 아마도 조선 침략의 선봉장이 바로 용골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더군다나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청나라를 대표하는 인물로 등장시키는 인물이 항상 이 용골대인지라 우리에게는 꽤 익숙한 장수이다.

그는 청의 2대 황제 홍타이지 즉위 이후, 더 많은 신뢰를 받아 수많은 전투는 물론 정치나 외교에서도 많은 역할을 맡았다. 특히 1627년, 용골대는 조선과의 관계 조율을 위해 처음 파견되었는데, 이때의 주목적은 청나라와 조선이 형제의 나라로써 조약 체결을 맺는 것이었다. 이때 용골대는 홍타이지의 요구에 대한 내용을 담은 국서를 들고 당시 조선의 왕 인조의 맹세를 받고자 했다. 

또한, 당시 조선이 멸망해가던 명나라의 관계를 종결하고 무역을 통한 경제활동을 청나라와 진행하자는 협상을 조선측에 전달하였으며 이를 통해 조선 국경에서 큰 시장을 열기도 하였다. 그 후에도 약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조선을 자주 왕래하며 외교 조율을 하였다. 

 

다양한 작품속에서 용골대는 무자비한 장군으로써 기록되지만 그는 외교나 행정에 있어서도 많은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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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자호란, 용골대 조선을 침략하다 

조선과 청나라의 문제는 앞서 말한, 국경의 시장을 통한 무역재개와 형제의 맹약으로 어찌저찌 잘 넘어가나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청나라는 청나라 나름대로 아직도 외교적으로 명나라에 애착이 있고 자신들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 조선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고, 여기에 조선과의 국경에서 진행되고 있는 무역조차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하면서 조선으로 하여금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의 더 많은 공물을 보내도록 협박하는가 하면, 형제의 맹약을 넘어 임금과 신하간의 관계로 양국의 관계를 조정하자는 무리한 요구까지 하게 되었다.

이에 조선 역시 청나라 오랑캐족에게 굽힐 수 없다는 주전파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면서 두 나라간의 외교 관계는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자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는 1636년 12월 조선을 침공한다. 이것이 바로 병자호란이다. 

용골대는 병자호란의 선봉장으로 군사 지휘는 물론 외교와 협상에도 참여하여 조선을 압박한다. 그리고 조선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대피하여 사면초가 상황에 이르자 청나라와 협상을 시작한다 .

 

이때 조선과의 협상 자리에 앉아 한달에 걸친 협상 기간을 진행한 것이 바로 용골대다. 이 협상과정에서 조선은 명나라와의 모든 관계를 끊고 청나라와 군신관계를 맺는 조약을 맺었으며 인조는 사실상 항복을 하게 된다. 

참고로 모자란 왕 인조는 용골대에게 뭐가 그리도 감사한지 은 2000냥을 주었다고 전해지는데 용골대는 이를 모두 자신의 나라에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드라마 화정 용골대
드라마 화정에서 용골대

3. 용골대는 어떤 인물이었는가?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는 용골대를 당연히 좋게 평가하지 않는다. 특히 우리나라 고전소설 <박씨전>에서는 용골대가 무식한 겁쟁이로 표현되기도 하며 각종 우리나라의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포악하고 능력 없는 인물로 표현된다. 그러나 사실 청나라의 역사에서 살펴보면 용골대는 장수보다는 관료였고 그 능력 역시 인정 받는 인물이다. 

- 장수로서의 면모

용골대는 청나라의 초창기 많은 전투를 승리한 장수였다. 만주족의 세력확장을 위해 앞서 말한 것처럼 누르하치의 젊은 장수로서 몽골원정은 물론 명나라 수도를 점령하는데도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특히 이때 800명 중 절반인 부상병을 이끌고  공성전에서 명나라의 공격을 막은 것은 그의 장수적인 능력과 면모를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이 밖에도 크고 작은 명나라와의 전투에 모두 참여하며 지금의 기획재정부 장관격이라 할 수 있는 호부 상서에 오르기도 하였다. 

- 정치 관료로서의 면모

용골대는 정치인으로서도 상당한 능력을 발휘한 인물이었다. 그는 호부상서로서 청나라의 모든 군수물자는 물론 제도를 정비하고 땅을 개간해서 청나라 초기 부족한 나라의 재정을 도맡았다. 또한 나라의 법을 집행하기도 하며 청나라의 황권 강화에 힘쓴 인물이기도 하며 여러 제도를 정비하여 당시 중국 한족의 반발을 누그러트리는데도 일조하였다.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는 이러한 용골대를 두고두고 아꼈으며 다음과 같이 총평했다는 기록이 있다. 


"모든 업무에 능하고, 명쾌히 처리하여 짐을 매우 기쁘게 한다. 나머지 신하들은 그의 일처리 솜씨에 미치지 못한다."

청나라의 역사에 이렇게 직접적으로 기록된 것을 봤을때, 그가 얼마나 신하로서 단순히 전투뿐 아니라 만능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여튼 이러한 용골대는 청나라 초기 많은 공을 세우고 1648년 2월, 5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용골대, 병자호란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자, 우리나라에서는 좋아할 수 없는 인물이지만 분명한 것은 미디어와 드라마에서 표현하는 것과는 달리 그 능력만큼은 탁월했단 청나라의 초기 공신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특히 용골대는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의 관계에도 신경썼던 인물로 기록되어 있는 만큼 그의 역사적 평가는 상당히 다채로운 것만큼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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