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히데요시가 극찬했던 다치바나 무네시게 그는 누구인가?
일본 역사에서는 나름 이름난 장수인데 영화 <노량>에서는 비중이 크게 나오지 않는 장수가 한명있다. 바로 다치바나 무네시게이다. 도요토미히데요시가 극찬을 한 인물이자 세키가하라전투에서 도쿠가와이에야스의 적편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인정받아 재기했던 유일한 인물, '다치바나 무네시게' 한자어로는 '입화종무' 그는 누구인가?
1. 다치바나 무네시게 출생과 청년 시절
임진왜란이 있기전, 1567년 다카하시 시게타네의 적자로 태어났다. 그가 14살이던 해 오토모 가문의 다치바나 도세쓰가
그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무네시게를 양자로 삼기 위해 아버지 쇼운에게 오랫동안 간청을 하였고, 오랫동안 거절하던 친아버지 쇼운이 힘들게 승낙하면서 도세쓰의 딸 다치바나 긴치요와 결혼해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긴치요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 별거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그해, 14살의 나이로 아키쓰키 가문과의 자신의 첫 전투를 시작으로 자신의 두 아버지 도세츠와 쇼운이 영토를 넓혀갈 때, 본 성인 타치바나야마 성을 지키고 화계로 적군을 격파하는 등 무공을 세운다. 1586년에는 시마즈가문이 침략해오자 친아버지 쇼운은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무네시게는 슬퍼하지 않고 게릴라전과 거짓항복 등을 통해 시마즈군을 물고 늘어졌고, 결국 본진을 기습하여 빼앗긴 성을 수복해내는 전공을 세운다.
이후 오토모 가문에서 독립한 다치바나 무네시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어 규슈의 시마즈가 정벌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는데 이를 본 도요토미히데요시는 무네시게를 이렇게 평했다.
'충의는 규슈에서 으뜸이요, 무용 또한 규슈에서 제일이다'
1587년에는 반란이 크게 일어나자 이를 정벌하여 7개의 성을 함락하였으며 함께 참전중이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를 의부로 삼는다. 이후 1590년에는 오다와라 정벌에서 또 다시 공을 세우자 도요토미히데요시는 다시 한번 무네시게를 극찬한다.
'동쪽에는 혼다 타가가츠라는 천하무쌍의 장수가 , 서쪽에는 타치바나 무네시게라는 천하무쌍의 장수가 있도다'
2. 다치바나 무네시게 임진왜란 참전
1592년 임진왜란에 참전하였으며 명나라의 원군을 벽제관에서 박살내는 전공을 올린다.
<벽제관 전투 일화> 도요토미히데요시의 측근이었던 '오봉행'(지금의 각 분야 장관들로 도요토미히데요시의 5명의 장관을 뜻함) 중 한명이었던 이시다 미츠나리가 왜군이 압승한 벽제관 전투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고 한다고 전하며 '이 공적을 태합 전하께 우키타 히데이에의 공적으로 전달할 것이지만 나에게 그대가 부탁한다면 무네시게의 공으로 해주겠네' 라고 말하자 '그대로 보고하는 것이 당신의 임무인데 부탁하면 잘 말해주겠다는 것이 무슨 말씀입니까?'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 |
또한 2차 전주성전투에서는 명나라 임호가 이끄는 4만의 군대를 히데카네와 함께 4천의 병력으로 막아내는 전공을 올리기도 한다. 이후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명나라 고책이 5만 군대를 이끌고 부산을 급습하자 화계와 기습을 통해 단, 800명으로 이를 막아내는 공을 세운다.
이번에는 제2차 울산성 전투에서는 포위당한 가토기요마사를 구원 하고자 1천명의 군대로 포위를 뚫고 가토를 구해내온다. 여기까지만 봤을 때 다치바나 무네시게가 자신이 유리한 상황에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상황이나 규모적으로 힘든 전투에서도 얼마나 많은 승리를 거두어 왔는지를 알 수 있다.
- 노량에서 그의 행적
노량에서 이순신장군은 조선의 국토를 침략하고 백성을 고난에 빠트린 왜군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고 도요토미히데요시가 병사하자 자신들의 본토로 철군하는 왜군을 공격하리라 마음 먹는다. 이때 조명연합수군은 480여척에 병력 1만 7천명, 일본수군은 500여척에 수군 15,500명이었다.
무네시게는 순천왜성에서 주둔하고 있다가 고니시유키나가군이 바닷길이 막혀 철군을 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를 돕고 함께 탈출하기 위해 나선다. 그리고 이때부터 조명연합수군과 일본수군은 배위에서 치열한 육탄전을 벌였다. 서로의 배를 뛰어다니며 적군을 참살하는 전투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의 지휘앞에 전세는 차차 조명연합군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 왜의 수군을 지휘하던 시마즈 요시히로는 조명연합군의 포위를 뚫고 일본으로 도망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의 역사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 되어 있다.
"일본의 수군을 지휘했던 시마즈 요시히로를 추격하다 이순신 장군은 선미에 엎드린 철포병의 일제 사격으로 심장 왼쪽 가슴에 피탄하여 전사했다. 이 싸움에서 시마즈 함선 300척 가운데 250척이 침몰하고 겨우 50척이 빠져나왔다. 시마즈는 그의 아타케부네가 대파하자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배로 옮겨 탔다.”
노량해전에서 무네시게는 결국 고니시유키나가를 구해서 왜로 다시 돌아온다. 이때 살아남은 일본 수군의 배는 50척에 불과하였으며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병사도 거의 전멸하다시피 한다.
3. 임진왜란 이후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삶
임진왜란 이후 도요토미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상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기 위해 일으킨 세키가하라전투에서 도쿠가와이에야스 반대편에 서게된다.
<세키가하라 전투 일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신이 있는 동군으로 회유를 했지만 무네시게는 이를 거절한다. 뿐만 아니라 가신들로부터도 서군이 불리하니 동군으로 가야 한다는 보고를 받았음에도 무네시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전에 시마즈의 대군에 맞서 타치바나 산성을 지켰는데 이는 오토모의 가신으로서 마땅히 해야할 일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태합 전하(도요토미 히데요시)께서는 크게 칭찬하시고 야나가와성을 하사하셨다. 이제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 타치바나 가문은 충절을 가장 중요시 생각하여 싸울 각오가 되어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
그러나 가는 길에 위치해있던 오츠성의 쿄고쿠 타카츠구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서면서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고 결국 이곳에서 발목이 잡히게 된다.
이후 쿄고쿠타카츠구를 제압하긴 했지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에 자신의 영토로 돌아가 결사항전을 외치다가 가토기요마사 등의 설득에 결국 항복한다. 항복한 무네시게는 모든 신분을 박탈 당하고 끼니를 걱정하며 사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거지신세임에도 그를 따르던 가신들은 돈벌이를 하며 무네시게를 도왔다고 한다.
또한 가토 기요마사를 비롯해 당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많은 다이묘들이 그를 가신으로 데려가고자 노력했지만 모두 거절한다. 이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능력적으로 그 당시 존경을 받았던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고난을 겪었음에도 무네시게는 훌륭한 인재였고 1604년, 도쿠가와이에야스는 무네시게를 불러들여 벼슬과 영지를 내렸다. 도요토미 가문의 마지막을 장식한 오사카 전투에서 임무를 수행하였고 또 다시 영지를 받으며 다이묘로 복귀한다.
이후에도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었음에도 시마바라의 난에 참천하여 승리를 거두는 등 공을 세우다가 향년 76세에 숨을 거둔다.
다치바나 무네시게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왜군의 장수이지만 당시 왜군에 있어서는 아군적군 할 것 없이 존경 받았던 인물임에는 틀림 없다. 이번 노량에서 순천왜성인 고성을 지키는 장수로, 일본 역사에서 수군대장 시마즈요시히로를 구했던 인물인만큼 과연 어떤식으로 표현될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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