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서양

신대륙의 발견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첫 항해

윤여시 2015. 4. 9.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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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륙의 발견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첫 항해


인류 역사상 위대한 모험가이자 탐험가를 뽑으라면 당신은 누굴 뽑겠는가?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 업적을 놓고만 따진다면 바로 이 콜럼버스를 꼽을 것이다. 콜럼버스 그는 누구였을까?




물론 아메리카 대륙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 콜럼버스는 아니지만

그의 발자국과 함께 서양의 역사가 달라진 것은 부인 할 수 없다.

 


|콜럼버스의 출생과 성장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451년 이탈리아 제노바의 직물공의 아들로 태어났다.그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북이탈리아인으로 그 부모가 맏아들인 콜럼버스에게도 직물업을 물려주려고 했기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는 가업에는 관심이 없었고 신분이 훨씬 높은 신부와 어울리며 지식을 쌓고 더 큰 꿈을 키운 총명한 청년이었다.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바다를 접하고 바다를 향한 꿈을 키워가던 콜럼버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은 다름 아닌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이었고 그는 이때부터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선원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또한 그는 이때부터 서쪽으로만 가면 마르코폴로가 말하는 동방이었던 보물로 가득한 인도가 나올 것이라 믿었고 이후부터 닥치는대로 항해서적을 읽으며 나름대로의 인도와의 거리를 계산하는 등 자신만의 계획을 세워간다. 또한 견습선원, 정식선원, 선장까지 역임하며 젊은 나이에 나름대로 항해 경험도 쌓아간다.



 


콜럼버스의 신대륙에 대한 믿음을 현실로 만들어 준 

스페인 여왕 이사벨 1세



|콜럼버스 항해 준비를 끝마치다 

 

1479년 콜럼버스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상선의 선원으로 배를 타고 이동하던 중 포르투갈과 프랑스의 공격을 받았고 그가 타고 있던 배는 침몰했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구사일생으로 배의 키를 잡고 겨우 리스본으로 이동했고 거기서 그는 유명한 항해가의 딸인 펠리퍼와 결혼했다. 1년뒤 콜럼버스는 펠리퍼에게서 사내아이 디에고를 낳았고 그 와중에도 항해에 대한 꿈을 이뤄가기 위해 장인의 항해서적이나 관련 정보들을 통해 공부하며 이것저것 준비를 끝마친다. 하지만 아무리 콜럼버스여도 넘어야 할 산이 있으니 바로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나갈 비용을 충원하는 일이었다.


이는 한 나라의 후원이 없으면 안되었기에 콜럼버스는 포르투갈의 주앙2세를 찾아가 자신에게 후원을 부탁한다. 콜럼버스는 당시 아프리카를 돌아 힘들게 인도로 갔던 항로를 바꿔 대서양으로 가면 쉽게 인도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으며 그의 의견은 묵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불운은 한꺼번에 찾아오듯 아내 펠리퍼마저 병으로 죽게 되었고 콜럼버스는 아들과 함께 포르투갈을 떠나 에스파냐로 떠난다.


에스파냐로 건너간 콜럼버스는 포르투갈에서 묵살되었던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당시 에스파냐 왕이었던 페르난도 왕과 이사벨 여왕을 찾았고 그들은 콜럼버스의 이야기를 듣고는 흔쾌히 콜럼버스의 의견을 받아드려 신대륙 발견의 후원을 약속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때 콜럼버스는 모험에 성공하면 자신과 후손들에게 새로운 귀족 칭호와 함께 상당한 액수의 돈을 요구 했으며 식민지를 발견할 경우 자신을 총독으로 임명해달라는 파격적인 요구를 했다고 하는데 후원 받는 자의 입장에서 그가 얼마나 그 자신을 믿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여튼 이사벨은 이마저도 승낙하며 콜럼버스를 굳게 믿어 주었으며 마침내 1492년 8월 3일, 콜럼버스는 이탈리아인,스페인인, 영국인, 유태인으로 구성된 120여명의 선원들과 3척의 배로 역사적인 첫 항해를 시작한다. 




카나리아제도


콜럼버스가 항해를 시작하기전 가장 먼저 들렸던 카나리아제도

 


|콜럼버스 첫 항해

콜럼버스가 탄 배는 100톤 규모의 산타마리아호였고, 다른 한척은 50톤 규모의 핀타호로 형 마르틴 핀슨이 다른 한척은 40톤 규모의 니나호로 동생인 비센테 핀슨이 선장을 맡았다. 그들은 먼저 에스파냐의 팔로스항을 떠나 최초 목적지인 대서양의 카나리아 제도로 배를 몰았다. 카나리아제도에서 서쪽으로 무역풍을 타고 향하겠다는 콜럼버스의 생각이었지만 선원들은 이를 알 턱이 없었고 서쪽으로 가는 콜럼버스에게 반감을 가지게 된다.

선원들은 출발한 지 3일째 항해를 멈추고자 핀타호의 키를 일부러 부러트렸지만 콜럼버스는 동요 없이 선원들을 설득하며 카나리아제도에서 3주일을 체류한 후 키를 고치고 9월 6일에 다시 출항을 시작한다. 이후 수주 동안 무역풍을 타며 순조롭게 출항하던 선단은 끝이 없는 바다를 향해 가기만 하자 콜럼버스의 말을 거역하는 선원들까지 생기기 시작한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이러한 선원들을 한명 한명 설득하며 항해를 계속했고 10월 7일, 핀타호의 한 선원이 소리 쳤다. 바로 바다에 떠다니는 풀잎과 갈대, 나뭇가지를 발견한 것이다. 이는 육지가 다가왔다는 증거였고 마침내 5일후인 1492년 10월 12일, 드디어 신대륙 땅을 밟게 된다. 콜럼버스를 비롯한 선원들은 서로 얼싸 안으며 기뻐했고 콜럼버스는 이 땅을 산살바도르(거룩한 구세주 라는 뜻)으로 불렀다. 이 섬이 바로 지금의 바하마 군도의 한 섬이다.



콜럼버스가 도착한 바하마 군도.. 저 미국의 마이애미가 보인다.

 


콜럼버스와 그 일행이 이 섬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이 본 것은 바로 이곳에 살고 있던 아즈텍 문화권의 원주민이었다. 난생처음 보는 원주민과 선원들은 서로를 신기해하였고 콜럼버스는 이들이 바로 인도의 원주민일 것이라 생각해서 인디언이라 불렀다. 한편 콜럼버스는 원주민에게 자신의 칼과 여러 유리 장식품을 선물로 주며 원주민들에게 식량을 받는 등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콜럼버스는 원주민과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섬 이곳저곳을 돌며 담배, 해먹(그물로 된 흔들침대)를 발견하는 등 진귀한 물건들을 수집했다. 

콜럼버스는 원주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싶다고 글을 쓰기도 했으나 사실 그에게 급한 것은 이사벨 여왕과 약속했던 금을 발견해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콜럼버스가 탐험을 하면서 그 어떤 곳에서도 금광을 발견하지 못하였고 콜럼버스는 급한대로 36명의 선원을 남겨둔 후 식민지를 만들어 놓은 다음 쿠바와 아이티 등을 탐험을 마치고 다시 재충전을 하기 위해 1493년 3월 이사벨 여왕에게 돌아간다.



지금의 아이티와 도미니카가 맞 닿아 있는 서인도제도에서 두번째로 큰 섬

히스파니올라 이곳이 바로 콜럼버스 원정의 전초기지였다.

 


이사벨 여왕에게 돌아간 콜럼버스는 장장 7개월 반만의 항해를 거쳐 그 동안의 탐험일지와 항해 정보 그가 발견한 것을 이사벨 여왕에게 전했다. 또한 그는 또 다른 항해를 위하여 이사벨 여왕의 후원을 약속 받았으며  콜럼버스는 이 항해의 성공으로 일약 스타가 되었다. 물론 발견하지 못한 황금이 가득하다는 거짓말도 살짝 덧붙여서 말이다.

여튼 첫 번째 항해에서 발견한 쿠바, 아이티 등을 콜럼버스는 인도의 서쪽이다 생각하여 서인도제도라 이름을 지었고 이는 지금까지도 아메리카 대륙에 생뚱맞게 서인도제도가 있는 유래가 된다. 콜럼버스의 첫 항해는 이렇게 그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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