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화완옹주의 양자로 정조를 막으려 했던 자, 백익 정후겸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21. 10. 9.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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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완옹주의 양자로 정조를 막으려 했던 자, 백익 정후겸 그는 누구인가?

정조가 나오는 드라마를 보면 항상 정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고모인 화완옹주 그리고 그 양자 백익 정후겸... 평민에서 옹주의 아들로 들어와 필사적으로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막으려 했고 그 댓가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정후겸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조카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걸 막았던 공주 화완옹주 누구였을까?

조카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걸 막았던 공주 화완옹주 누구였을까? 조선왕조의 공주들 중 화완옹주는 아주 특별한 공주이다. 영조의 사랑을 받았지만 친오빠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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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이산>에서 정후겸

|정후겸 출생에서 궁에 들어오기까지 

 

1749년 지금의 인천 제물포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평민으로 생선장수로 겨우 연명하던 아버지 정석달의 6남 2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몰락한 양반 가문으로 5대조 정시창이 인조대에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생활을 하고 그의 고조부 정백빈이 장수하여 정 3품에 오른 것 빼고는 그의 가문에서 더이상 인물이 나오지 않았으며 그 아버지 역시 생선 장수로 하루하루를 이어가는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게 된다. 

그런데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화완옹주의 남편이었던 정치달이 죽자 그의 일족에서 양자를 입양하게 되는데, 정치달과 11촌 지간이었던 정후겸이 화완옹주의 눈에 띄게 되면서 하루아침에 옹주의 아들로 신분세탁을 하게 된다. 그야말로 로또중에 로또 상팔자 중에 상팔자였던 것이다.

 

옷소매붉은끝동 정후겸

|정후겸의 관직생활

1757년 8살의 나이로 화완옹주의 양자로 입적하게 된 정후겸은 음서로 관직에 오른 후, 머리와 언변이 좋았던지라 영조의 눈에도 들게 된다. 이후 16세의 나이로 장원서 봉사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그야말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며 노론벽파의 후원까지 등에 업으며 19세의 어린 나이에 좌승지, 20대에 병조 참판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20대의 병조참판에 오른 것은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 하던 화완옹주라는 뒷배의 도움도 있었겠지만 그가 머리가 비상했던 인물임은 부인할 수 없다. 

한편, 정후겸이 속해 있던 노론 벽파를 비롯해 혜경궁 홍씨의 숙부이지만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막았던 홍인한을 대표로 하는 외척들은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아야 했다. 때문에 머리는 좋으나 야심이 가득했던 정후겸 역시 이러한 정치 공작에 가담하여 온갖 공작을 실시하였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으려 한다. 

 

|정후겸 -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두고 홍국영과 대립하다 

정후겸은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막고자 홍인한, 김귀주 등과 결탁하여 정조의 대리청정을 방해하고 정조가 세손 당시 머물고 있던 동궁에 사람을 심어 세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한편, 유언비어를 퍼트려 세손의 비행을 폭로하는 등 무차별적인 정치공작을 벌인다. 

그러나 그와 정치적 라이벌이자 정조의 심복이었던 홍국영은 이같은 음모를 하나하나 막아세우며 늙은 영조 대신 정조의 대리청정 구도를 만들어내었다. 이에 정후겸은 홍국영의 탄핵을 주도하기까지 했으나 영조는 정조의 편을 들어주었고 홍국영은 마침내 영조의 죽음 후,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지켜내었다. 

 

|정후겸 - 정씨가 왕위에 오른다는 정감록을 믿었던 자

 

정후겸은 이씨 다음으로 '정씨가 새로운 왕이 될 것이다'라는 예언책인 <정감록>을 믿었던 자로 마지막에는 쿠데타까지 생각하며 사병을 키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야심이 가득했던 자였는데 조선왕조실록 <영조편>에서 그를 기록하길 '품행이 거만하고 예의가 없으며 막대한 재산을 착복하고 전횡을 일삼았다고 전해진다.' 마치 졸부처럼 갑작스러운 출세에 인성이 받쳐주질 못한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겠다. 

 

|정후겸의 몰락과 최후

 

1776년 정조가 마침내 즉위를 하자마자 자신을 위협했던 세력에 대한 철저한 숙청 작업이 들어간다. 물론 이 역시 홍국영이 주도하니 그 칼날이 매서웠다. 수많은 곳에서 정후겸을 처벌하라는 상소가 빗발치니 정조 역시 이를 명분으로 함경도 삼수갑산의 삼수로 귀양 보냈다가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한다. 그의 양모 화완옹주 역시 옹주 작위를 박탈당하고 정치달의 처라는 뜻으로 정처라 불리며 쫒겨났고 아버지 정석달 등은 유배되었다.

이후 순조 때 세도정치의 중심 김조순이 역적으로 다시 한 번 정후겸을 단죄했으나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갑자기 생뚱맞게 1908년 매국노 이완용의 건의로 복권된다. 


정후겸은 하루아침에 벼락출세한 야심 많던 인물의 최후가 얼마나 비참한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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