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걸 막았던 공주 화완옹주 누구였을까?조카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걸 막았던 공주 화완옹주 누구였을까?

Posted at 2021. 10. 6. 23:26 | Posted in 국사/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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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걸 막았던 공주 화완옹주 누구였을까? 

조선왕조의 공주들 중 화완옹주는 아주 특별한 공주이다. 영조의 사랑을 받았지만 친오빠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하고 그 아들이자 조카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그토록 막았다가 몰락을 했다고 전해지는 화완옹주. 그녀는 과연 누구였길래 이러한 정치적 행보를 걸었을까?

 

화완옹주는 21대 영조와 정빈이씨의 막내딸이다

 

|화완옹주의 출생

 

1738년, 화평옹주는 영조와 영빈 이씨의 막내딸이자 영조의 자식 9명 중 막내 9녀로 태어난다. 여기서 옹주는 왕의 서녀를 일컫는데, 남자일 때 서자와 같은 개념이다. 영빈 이씨에게서 낳은 사도세자의 동복 막내 동생이기도 하다. 

 

화완옹주가 11세 되던 해 영빈 이씨의 3녀 중 첫째인 화평옹주가 출산 중 죽고 만다. 이때부터 영조는 화완옹주를 너무나 총애 했다고 전해지는데, 자신들의 언니들인 화억옹주, 화순옹주 등이 일찍 세상을 떠났고 영조가 효장세자의 죽음 후 아들을 기다렸지만 그다음 태어났던 화협옹주에게는 정을 주지 않으면서 모든 사랑이 화완옹주에게 가게 된 것이었다. 혜경궁 홍씨 역시 한중록에서 화평옹주의 죽음 이후 화완옹주를 유독 사랑했다고 쓰여져 있다. 

 

영화 <사도>에서 화완옹주 역을 맡은 진지희

 

|화완옹주의 혼인과 영조의 애정

화평옹주가 죽고 1년 후인 1749년, 화완옹주는 12세의 나이로 이조판서인 정우량의 아들 정치달과 혼인하였다. 이때 정치달을 부마로 택한 이유는 영조가 정씨 가문과 인연이 있었고 그가 집권 내내 추진했던 탕평책의 일환이기도 했다.

 

그리고 결혼 후 약 7년 뒤인 1756년, 화완옹주는 마침내 딸을 낳았는데 이때 영조가 해산한 화완옹주를 축하하기 위해 버선발로 뛰쳐 찾아갔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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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안타깝게도 화완옹주의 딸은 5개월만에 숨을 거뒀고, 한달 뒤에는 남편 정치달마저 사망하고 만다. 영조가 얼마나 화완옹주를 사랑했냐면 정치달이 죽던 같은 날에 자신의 아내였던 중전 정성왕후 서씨가 죽었는데도 영조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치달의 문상을 먼저 가서 밤이 되어야 돌아왔다고 전해진다. 이것만 봐도 영조의 화완옹주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여튼 영조는 20세의 나이로 하루아침에 과부가 되어버린 화완옹주를 궁으로 들어와 살게 했으며 정치달의 형제였던 정석달의 둘째 아들 정후겸을 양자로 정해주는 등 후손을 생각해주었다. 

드라마 <이산> 화완옹주

|사도세자 그리고 조카 정조와의 악연

 

화완옹주는 사도세자를 죽게 한 임오화변에 관련이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물론 큰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것은 의문점이 남지만 사도세자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영조의 눈 밖에 난 사도세자의 실수와 비행을 모두 고해 바쳤다. 또한 사도세자가 나인인 빙애를 후궁으로 취한뒤, 화완옹주의 처소에 숨겨두었는데, 빙애가 영조에게 알려지면서 사도세자가 더욱 위기에 몰린 일화도 있었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세손시절에도 화완옹주는 정조와 그의 아내였던 효의왕후를 괴롭힌다고 전해진다. 특히 한중록을 살펴보면 정조가 세손이었던 시절 세손빈을 질투해 이간질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러한 이유들 때문인지 실제로 정조와 효의왕후의 관계가 좋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영조의 총애를 등에 업고 정후겸과 함께 정조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는 등 조카와 고모 사이는 정치적으로도 악연이 되어버린다. 

 

붉은달에서 화완옹주 역을 맡은 박소담

|화완옹주의 몰락

 

영조가 죽고 세손이었던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는 세력에게는 폭풍이 불어 닥칠 것은 자명한 일이었고, 이는 화완옹주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신하들은 화완옹주를 사형시켜야 한다고 말하지만 할아버지 영조의 총애가 얼마나 컸는지 알기 때문에 정조는 영조 3년상까지는 화완옹주를 보호하려 하였다.

 

이후 상소가 끊이지 않자 1778년 정조는 화완옹주는 옹주의 작위를 삭탈하고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시킨다. 이때부터 화완옹주는 '정치달의 처'라는 의미로 정처라 불리게 된다. 이후에도 사형을 말하는 신하들의 상소가 끊이지 않았으나 정조는 이를 거부한다. 

화완옹주를 교동에 유배시키긴 했지만 정조는 문안을 하기도 했으며 정조 6년(1782년)에는 남편 정치달의 묘가 있는 파주로 옮겼고 병위문을 하였으며, 마침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조가 갑작스러운 승하하기 1년 전인 1799년 정처의 죄명을 없애고 궁에 들어와 사는 한편 용서하라는 하교를 내리기도 한다. 

 

정조가 죽은 후 순조가 왕위에 오른 후에도 화완옹주에 대한 상소가 올라왔으나 순조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순조실록에 따르면 순조가 왕위에 오른지 8년 후인 1808년 정치달의 처가 죽어 죄를 묻지 않겠다는 기록이 있는데 화완옹주는 1808년 죽은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화완옹주가 유배지였던 곳이자 남편 정치달이 묻힌 파주시에 함께 묻혔으며, 무덤의 모습에 졸기가 없는 것을 보아 죄를 완전히 용서 받진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묘는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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