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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산과 명량 노량 준사 실존인물? 임진왜란 항왜에 대해서 알아보자

윤여시 2022. 6. 13.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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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산과 명량 노량 준사 실존인물? 임진왜란 항왜에 대해서 알아보자

임진왜란 이순신 장군의 기적같은 승리를 토대로 만든 영화 <명량> 그리고 <한산>, <노량>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감동이 더 한 영화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영화속에서 이순신 장군을 도와 승리를 이끌어낸 인물들 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인물이 있다. 바로 일본인 역할의 '준사'이다. 

 

실제 전투를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준사라는 일본인이 이순신 장군을 돕는 것이 사실일지 허구일지 의심이 되는데, 실제로 준사라는 인물이 존재 했을까?

 

영화 명량속 준사 역할을 맡은 '오타니 료헤이'

|준사 그는 실존인물이었을까?

 

준사가 실존인물이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기록을 찾아봐야한다. 그런데 그 기록이 난중일기 명량해전을 다룬 기록에 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는 명량대첩의 승리 이후 항복한 왜군 준사가 등장한다. 준사는 바다에 빠져 죽은 왜군들을 보면서 '저 무늬 있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자가 적장 마다시 입니다.'라고 말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은 마다시를 바다에서 건져 목을 내다거니 왜군의 사기가 꺾였다고 전한다. 여기서 준사가 지목한 마다시가 명량에서 류승룡이 맡은 역할인 '구루지마 미치후사'라는 설이 유력하다. 

 

명량에서 구루지마 역을 맡은 류승용

|준사 한산도대첩 때도 등장?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 한산은 우리가 잘알고 있는 것처럼 한산도대첩을 다룬 영화다. 그런데 난중일기에서 준사를 기록하기를 안골포해전에서 투항한 왜군 '항왜'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안골포해전은 1592년 7월 10일로 그 이틀전 7월 8일 열린 해전 한산도대첩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이 맞다. 

 

물론 준사에 관한 기록은 난중일기에서 기록된 이 짧은 부분 말고는 더는 찾아볼 수 없으니 그가 투항한 왜군인 것 말고는 영화처럼 이순신 장군의 보디가드처럼 임무를 수행했는지는 알 수 없다. 준사는 실존인물이지만 그의 행적에는 분명 영화적 상상력이 들어간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다. 

 

준사말고도 항왜라 불리며 조선에 투항한 왜군들은 많았다

|준사 말고도 임진왜란 때 조선과 함께한 왜군들이 있었다

 

1) 김충선(사야가) : 김충선 일본 이름 사야가는 임진왜란을 대표하는 항왜이다. 사야가는 1592년 4월 15일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당시 왜군 명장 가토기요마사의 제2진 선봉으로 부산포에 상륙한다. 그러나 사야가는 왜군이 부산포를 쉽게 접수하였음에도 부하들과 조선에 투항한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의롭지 못한 전쟁으로 동방예의지국 조선의 백성이 되고자 한다'고 말했다. 

조선 조정은 사야가의 뜻을 크게 생각하여 정2품 자헌대부에 제수하고 김해김씨의 성을 내렸으며 충성스럽고 착하다는 뜻의 충선이라는 이름을 붙여 김충선이라 이름을 지었다. 특히 그의 본관인 김해김씨는 임금이 하사한 성이라 하여 '사성 김해 김씨'라고 불리게 된다. 

이후 김충선은 임진왜란에서 조총과 화포를 생산하고 군사를 훈련시켰으며 인조때에는 이괄의 난을 막고 병자호란 때 공을 세우는 등 조선이 가장 국난에 빠져 있을 때 그 공을 인정 받아 공신 칭호까지 얻게 된다. 

 

여여문이 활약한 울산왜성전투

2) 여여문 : 여여문은 임진왜란 때 언제 어떻게 조선으로 투항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투항한 일본인을 조선이 후하게 대접한다는 말을 듣고 투항을 결심했다고 전해진다.

 

여여문이 얼마나 대단한지 선조실록에 남아 있는데 '보통 왜인이 아니니, 대우를 후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여기에 명을 받은 훈련도감에서도  '여여문을 집중치료 하여 회복되었음에도 명령대로 더 특별히 후대하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여여문은 검술이 뛰어난자였으며 일본군의 진법을 조선에 알려주는 등 큰 공을 세운다. 뿐만 아니라 여여문은 자신을 최전방으로 보내주길 조정에 간청하였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경주진공작전은 물론 왜군의 변장을 하고 정탐 임무를 수행하는 목숨을 건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여여문은 1598년 1월 왜군의 정탐을 마치고 수급을 취해 명나라 진지에 들렸다가 명나라 장수의 공적 욕심에 살해당하고 만다. 그야말로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선조는 여여문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으며 당시 우의정 이덕형은 여여문에게 반드시 상급을 내려야 한다고 주청을 올리기도 한다.

 

|임진왜란 당시 항왜의 공로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항왜의 수는 1만명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많은 기록에서 항왜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는데, 이들은 왜군의 용병술의 약점을 조선군에게 알리거나 스파이 활동, 조총 생산 등 다양한 부분에서 많은 공적을 세운다. 

때문에 조정에서는 항복하는 왜군들을 의심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받아드리라는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특히 선조는 '항왜처럼 용감하게 싸우는 자가 있으면 나와보라'고 할 정도로 항왜를 신임했다. 준사나 김충선 또는 여여문말고도 수많은 왜군들이 조선에 투항하여 조선을 위해 싸웠던 것이다.

 

이번 영화 한산의 준사가 과연 항왜의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잘 담아낼지 기대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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