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임진왜란 이순신 장군을 가장 최측근에서 보좌한 또 다른 영웅 송희립

윤여시 2022. 7. 19.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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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순신 장군을 가장 최측근에서 보좌한 또 다른 영웅 송희립  

임진왜란 이순신장군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에는 항상 이순신 장군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송희립 장군이다. 임진왜란 전투가 있을 때면 항상 이순신 장군이 탑승한 대장선에서 명을 수행하고 보좌했으며 목숨을 바쳐 전투를 수행했던 송희립 장군, 한마디로 그는 이순신 장군의 비서실장 정도 되는 인물이었다. 과연 누구일까? 

|송희립 장군의 출생과 무과 급제 - 임진왜란 전

1553년 지금의 전라도 고흥군에서 태어난 송희립 장군은 당시 현감을 지낸 송관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형은 송대립, 동생은 송정립으로 송희립과 함께 임진왜란에서 목숨을 바쳐 조선을 위해 싸운 인물들이다. 

그의 형제들에서 볼 수 있듯이 송희립 장군의 집안은 대대로 충절이 깊은 집안이었다. 그의 조상 송간은 1455년 세조가 단종을 내쫒고 왕위에 오른 후 벼슬을 버리고 전남 고흥군에 은거하며 일생을 마쳤다. 때문에 그 후손들 역시 전남 고흥에 정착해 있었고 송희립 역시 고흥군에서  태어난 것이다. 

 

송희립 장군은 나이 30이 되던 1583년 별시로 치른 무과에 159위로 급제한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전인 1591년 이순신 장군의 직속 군관이 되었다. 이후 거북선의 건조 등을 감독하다가 1592년 임진왜란을 맞게 된다.

드라마 불멸의이순신에서 송희립 장군 역을 맡은 배우 김명국

|송희립 장군의 활약 - 임진왜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송희립 장군은 녹도만호 정운의 군관으로 거제에서 왜군을 격파한 후 원균과 합동 작전을 주장했다. 원균이 겁을 먹고 경상도 해역을 버렸을 때도 송희립은 모든 장수들이 전라도 해역만 지키자고 말하지만 이순신 장군에게 '적을 토벌하는데 우리 도와 남의 도가 따로 없습니다. 적의 선두를 꺾으면 우리 도를 보전 할 수 있다'고 간언하여 이순신 장군의 출정을 돕기도 했다. 이순신 장군의 현장참모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한 것이다.

 

이후 본격적으로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 있으면서 대장선에 함께 탑승하여 옥포해전, 사천해전, 한산 대첩, 부산포 해전을 승리로 가져가는데 공을 세운다. 이렇게 이순신 장군이 연전연승을 하며 왜적을 꺾었지만 조정에서는 멍청하게도 이순신 장군을 항명했다는 이유로 한양으로 불러 들여 고문을 하고 백의종군하게 한다.

 

이때 송희립은 정경달, 정탁, 황대중과 함께 직접 대궐 문 앞까지 찾아가 이순신 장군의 무죄를 고하며 이순신 장군의 억울함을 알리기도 했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하면서 조선 수군을 원균이 이끌게 된다. 그리고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칠천량해전에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으며 조선 수군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지만 송희립 장군은 다시 돌아온 이순신 장군의 휘하로 들어와 명량해전에 참여하여 단 12척의 배로 일본 왜군함 33척을 박살 내는데 함께하여 공을 세운다. 이순신 장군이 위기에 있었어도 그를 신뢰하며 믿고 따른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형 송대립도 이순신 장군을 보좌했다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 할 당시 송대립 장군은 이순신 장군의 옆에서 수군 재건을 돕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후 육지에서 의병을 이끌며 왜군과 싸우다 결국 전사하게 된다. 형과 아우 모두 이순신 장군과 함께 한 것이다. 

|송희립 장군의 일생 -  노량해전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급작스럽게 숨을 거두면서 왜군들은 혼란에 빠진다. 이후 왜군을 대표하여 고니시유키나가는 명나라 진린에게 화친을 청하며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퇴로를 열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을 비롯하여 송희립 장군 역시 절대 왜군이 편히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줄 수 없다며 거절한다. 

급해진 고니시는 모든 왜군선을 노량 앞바다에 집결시키니 그 함대가 무려 500여척에 다달았다. 이에 이순신 장군이 송희립 장군에게 계책을 묻자 바다와 육지에서 동시에 수륙양동작전을 제안하였고 이순신 장군이 이 계책을 그대로 받아드리게 된다. 

 

송희립 장군의 계책대로 조명연합군이 육지와 바다에서 왜군을 봉쇄하자 고니시는 더욱 다급하게 명나라 진린에게 화친을 청했으며, 이에 송희립 장군은 다시 나서 '지금 화친을 해도 왜군은 다시 공격해올 것이니 넓은 바다에서 박살을 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전투가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이다.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 있던 장수들은 다른 곳으로 진급되어 가거나 발령이 났는데 오직 송희립 장군만이 임진왜란 처음부터 노량해전까지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서 모든 것을 함께 한 것이다.

노량해전이라는 최후의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은 왜군을 몰아 붙이며 쉽게 승리하나 했지만 명나라 진린이 타고 있는 전선이 갑자기 왜군에게 포위당하면서 이를 지키러 조선 수군이 구출작전을 나섰다가 이순신 장군, 이영남, 이언량 장군 등이 전사하고 만다. 이때 송희립 장군은 이순신 장군이 탄 배에서 장군의 시신을 수습한 후 홀로 북을 치며 조선 수군을 격려하며 전투를 치룬다. 그리고 송희립 장군 역시 이 전투에서 총상을 입는다.  

 "노량해전의 전공은 모두 이순신이 힘써 이룬 것으로 불행히 총탄을 맞게 되어 군관 송희립 등 30여명이 상인(喪人·아들과 조카)의 입을 막아 곡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고 군사를 재촉하여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이 영각을 불어 모든 배가 이순신의 죽음을 알지 못하게 함으로써 승리할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이순신 장군, 정운 장군, 송희립 장군을 모시고 있는 전남 순천의 충무사

|송희립 장군의 죽음

전쟁이 끝난 후 1601년 양산군수 다대포 첨사를 거쳐 1611년 광해군 4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된다. 1619년 67세의 나이에 별장으로 재직하고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해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전남 순천의 충무사 등에 이순신 장군, 정운 장군과 함께 배향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했던 송희립 장군, 이순신 장군을 최측근에서 보필하며 대장선에서 함께 조선 수군을 진두 지휘했던 그의 용맹함과 나라에 대한 충절을 꼭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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