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이 가장 아꼈던 선봉장 불멸의 용사 정운 장군
이순신 장군이 자신의 휘하 장수들을 공명정대하고 아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 중 이순신 장군이 가장 아꼈던 장군 중 꼭 이름을 올리는 장수가 있다. 바로 전투에서 앞서 싸우며 왜군을 최전선에서 무찌른 장수 정운이다. 이순신 장군이 가장 신뢰했고 전쟁 중 먼저 전사했을 때도 이순신 장군이 너무나 안타까워했다던 장수 정운, 그는 과연 누구일까?
|정운 장군 출생 - 임진왜란 전
정운 장군은 1543년 지금의 전라도 해남땅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훈련원 참군(무관들의 교육과 선발을 맡던 관직)을 지낸 정응정이다. 아버지의 관직 때문일까 정운은 1570년 28살의 나이로 병과에 급제하였고 훈련원봉사를 거쳐 함경도 땅에서 벼슬생활을 시작한다.
성격이 워낙 강직하고 FM대로 사는 성격이라 그를 감사하는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 제대로된 벼슬을 하지 못한다. 이후 웅천현감, 제주목 판관 등 모두 짧은 재임 기간을 거쳐 정운 장군은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 녹도만호가 된다.
그의 성격에 대해서는 <국조인물고>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젊어서부터 강개하여 호협한 기풍이 있어 매양 절의에 따라 죽을 수 있다고 스스로 허여하였다. 무과에 급제하여 일찍이 거산찰방이 되었을 때 감사(관찰사)의 수행원 중에 신임을 받은 사람이 민폐를 끼치자 공(정운)이 곤장을 쳤는데, 감사가 좋아하지 않자 곧바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웅천현감이 되어 감사의 미움을 사자 또 그날로 인수를 풀어놓고 떠나버렸다. 이윽고 제주목 판관에 임명되었다가 또 목사의 비위를 거슬러 파직되었는데, 돌아오는 배에 한 마리의 망아지도 데리고 오지 않았다. 그의 강직하고 청고(淸高)한 바가 모두 이와 같았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여러 해 동안 침체되어 있었다." - 국조인물고- |
|정운 장군 임진왜란을 대비하다
흔히 이순신 장군은 왜란이 일어나기 전, 조선 수군을 최강의 수군으로 만드는 선견지명을 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 말고도 전쟁을 대비한 장군이 있었으니 바로 정운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두달 전, 전라 좌수사 이순신 장군은 휘하 부대를 쭉 순시하며 제대로 되지 않은 지역의 장수들에게는 책임을 물었다. 그런데 정운 장군이 있는 녹도진(전남 고흥)은 너무나 대비가 잘 되어 있어서 이순신 장군이 칭찬을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정운 장군의 녹도진이 이렇게 전쟁 준비가 잘 되어 있던 것은 임진왜란 5년전인 1587년 왜선 20척이 손죽도를 점거한 사거 때문인데 이때 정운 장군이 이 장소를 오면서 완벽하게 전쟁 대비를 해놓은 것이었다.
한편, 정운장군은 나이가 이순신 장군보다 많았음에도 이미 이순신 장군에 대해 들어 알고 있던 정운은 이순신 장군이 상관이라는 소식에 몹시 기뻐했다는 기록이 있다.
‘정운은 강개하고 큰 뜻이 있어서 그럭저럭 남이 하는 대로는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보검을 얻어 스스로 ‘진충보국’이라 새겼다.…녹도만호가 되고 이순신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자 정운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내가 돌아가 의지할 곳을 얻었다. 그를 위해 죽으면 다행이겠다”고 했다’ -백호 윤휴(1617~1680), 백호전서- |
|정운, 임진왜란 발발 - 이순신 장군에게 옥포해전 출전을 건의하다
임진왜란 발발 후 조선 수군의 첫 해전인 옥포해전 때 이순신 장군은 고민하고 있었다. 원래 전라우수사 이억기 함대를 기다렸다가 함께 수군 작전에 돌입하려 했기 때문인데 급작스럽게 경상우수사 원균이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이때 정운 장군과 송희립 장군이 이순신 장군의 출정을 강하게 요청했다는 기록이 있다.
'적을 토벌하는 데, 우리 도와 남의 도가 없다. 적의 예봉을 꺾어 놓아야 전라도도 보전할 수 있다.'
"영남의 말을 듣고 여러 장수는 '우리가 우리 지역(전라도)을 지키기에도 부족한데 어느 겨를에 다른 도(경상도)에 가겠는가' 하였다. 그런데 녹도만호 정운과 군관 송희립만은 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이순신에게 진격하기를 권하여 말하기를 '적을 토벌하는 데 우리 도와 남의 도가 따로 없다. 적의 예봉을 먼저 꺾어놓으면 본도(전라도)도 보존할 수 있다' 하니 이순신이 크게 기뻐하였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 5월 1일자- |
조선수군의 첫 전투인 옥포해전에서 정운 장군은 함대 맨 뒤에 배치되었음에도 돌격을 먼저하여 왜선 2척을 침몰시키는 공을 세우기도 한다.
이후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적진포(5월 8일) , 사천(5월 29일), 당포(6월 2일), 당항포(6월 5일), 율포(6월 7일), 한산도(7월 8일), 안골포 (7월 12일) 등에서 연전연승을 함께하며 조선 수군의 선봉장이자 돌격대장 역할을 해낸다.
|정운의 전사 '나라의 오른팔을 잃다'
안골포해전에서 승리를 거둔지 약 한달 후 9월 1일, 조선 수군은 처음으로 왜군 본거지인 부산포를 기습한다. 이때 정운은 다시 한 번 선봉에서 왜군을 까부수는데 절영도에서 쏜 적의 대포에 맞아 안타깝게 전사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정운 장군이 맞은 총환은(대포라는 설도 있음) 참나무 방패 3개를 관통하고 쌀 2석을 또 뚫고 지나 정운의 몸을 관통한 다음 뱃전에 박힐 정도였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은 정운 장군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가 오른팔을 잃었도다"라며 안타까워했다고 전한다. 또한 정운장군의 시신을 수습하여 안장하고 제문을 지어 올린다. 당시 사령관이 직접 장수의 죽음에 제문을 올린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고 하니 이순신 장군이 정운 장군을 얼마나 아꼈는지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아, 인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고 사는 데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으니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이야 정말로 아까울 게 없으나 유독 그대의 죽음에 대해서만 나의 가슴 아픈 까닭 무엇인가요.……아, 슬프도다……" , "내가 모자라고 서툴러 그대와 함께 의논하니 구름이 쪼개져 밝은 빛이 비치듯 했다. 계책을 정하고 칼을 휘두르며 배를 이어 나갈 적에 죽음을 무릅쓰고 앞장서서 나아갔으니 네 번이나 이긴 싸움 그 누구의 공이겠는가"
- 이순신 장군이 정운 장군에게 올리는 제문-
정운이 죽고 조정에서는 북도병마절도사로 임명하고 정조때는 충장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기도 한다. 또한 사당은 물론 녹도진 성안의 쌍충사에 이순신 장군의 건의로 묘당에 오르게 된다. 오늘날 그의 용맹함은 우리 해군에게까지 전해져 1997년 건조된 잠수함에는 정운함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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