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태종의 둘째 아들이자 술을 못먹어 왕이 되지 못한 효령대군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22. 8. 11.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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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의 둘째 아들이자 술을 못먹어 왕이 되지 못한 효령대군 그는 누구인가?

조선 초기 세종대왕이었던 태종의 셋째 아들 충녕대군이 형들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기까지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특히 장남인 양녕대군과 그를 뛰어넘고 왕이 된 셋째 충녕대군(세종대왕)의 대립은 곧 잘 드라마에서 다루어지는데, 유독 둘째 효령대군의 이야기는 잘 나오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장남인 양녕대군이 왕의 재목이 아니라면 다음 순위인 둘째 효령대군이 왕이 되어야 했는데 그는 부족했던 인물인걸까? 효령대군에 대해 알아보자 

효령대군 영정

|효령대군 유년시절 - 무난했고 둥글둥글한 성격

효령대군은 1396년,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두번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세종대왕의 둘째형이다. 효령대군은 왕자인 시절 양녕대군이나 충녕대군에 비해 기록이 많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이 '효령대군은 잘 웃는다'라고 말한 기록이 있다. 성격이 둥글둥글하고 무난하여 존재감이 없는 듯 딱히 부모의 속을 썩이지도 않은 것 같다. 

 

효령대군은 또한 어렸을 적부터 글을 좋아하고 명필로 알려졌다. 또한 활쏘기는 물론 효심이 깊어 태종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던 왕자이기도 했다. 

 

|효령대군 왕이 되어보려 하다? 술을 못마신 효령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이 폐세자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무렵 야사에서는 효령대군이 이를 알아채고 갑자기 책을 펴고 공부하는 척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자 양녕대군이 효령대군을 혼내며 충녕대군이 왕이 될것이라 말하는 대목이 있다. 물론 정사가 아닌 야사일뿐이기 때문에 효령대군이 왕위에 욕심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효령대군의 정치적 배경이 거의 전무했던 것으로 봐서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많겠다. 

양녕대군이 폐세자되고 효령대군이 잠깐 다음 세자 후보가 되었으나 태종은 효령의 성격과 술을 못마신다는 이유로 효령대군보다는 아우 충녕대군을 선택한다. 

"술을 마시는 것이 비록 무익하나, 그럼에도 중국의 사신을 대하여 주인으로서 한 모금도 능히 마실 수 없다면 어찌 손님을 권하여서 그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느냐?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 효령대군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니, 이것도 또한 불가하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물론 단순이 술을 못마시기 때문에 효령대군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은 아니다. 유교의 나라를 표방하는 조선에서 효령대군은 일찍부터 불교에 심취해 있었고 순하디 순한 성격인지라 야망의 태종 이방원으로서는 분명 왕의 재목이 아닐것이라 생각한 듯 하다. 

드라마 대왕세종에서 효령대군

|조선 초기 불교 문화를 이끈 효령대군 

효령대군은 조선 초기 불교 문화를 이끌어간다. 불교의 나라였던 고려가 망하고 숭유억불 정책을 펼쳐온 조선에 있어서 효령대군은 조선 불교문화를 지켜내었다. 

그는 1429년(세종11) 관악사 건립을 시작으로 월출산 무위사, 만덕산 백련사, 관악산 연주암 중건을 맡기도 했다. 또한 지금은 터만 남은 회암사의 중수, 각종 불수 행사는 물론 원각사 창건때는 조성도감 도제조를 맡아 보신각종은 물론 국보2호인 원각사지 10층석탑의 건축까지도 관여한다.

 

또한 수많은 법전의 교정은 물론 전국의 사찰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에게 불도를 전파하기도 하였다. 조선 초 씨가 마를뻔한 불교가 효령대군 덕분에 지켜졌다고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서울 방배동에 위치한 효령대군의 묘

|조선왕실에서 가장 장수한 왕자 효령대군, 종친으로서 극진한 예우를 받다

효령대군은 만 90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는데, 이는 당시 조선사회의 평균 수명 40세의 두배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장수인생이었다.

 

특히 이를 조선왕조로 비교해보면 더 어마어마한 수치인 것이,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즉위하고 5년뒤에 태어난 효령대군은 그가 죽은 1486년 성종 17년에 죽음을 맞이한다. 따라서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에 이르는 9명의 왕을 직접 지켜본 것이었다. 조선 역사가 500년이니 그중 거의 100년을 효령대군이 직접 목격한 셈이다. 여기에 연산군이 태어난지 10년이 있다가 죽은 것이니 그야말로 조선 초기 역사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겠다. 

그가 왕자일 때보다 오히려 성종실록에 그 기록이 더 많이 남아 있는데 증조, 고조를 넘어 그야말로 엄청난 어른이었던지라 매년 잔치를 베풀고 연회를 열었다고 전해진다. 효령대군의 아들 나이가 60살이었다고 하니 그 아들들도 장수한 것인데 그야말로 엄청난 기록이라 할 수 있겠다. 

효령대군은 1486년 90세의 나이로 죽으니 어쩌면 왕위에 오른 세종보다 인생만 놓고 비교해봤을 때 더 행복한 삶이었을 수도 있다.  그의 오랜 삶 덕분에 손자만 33명이었고 증손자만 109명이니 그 자손도 번창하였다. 지금 효령대군 효령대군은 50만 전주이씨 효령대군파의 파시조로 그의 무덤이 있는 서울 방배동 청권사 앞을 효령로라 명명하였고 그 맞은편에는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종회회관이 있는 프린스 효령빌딩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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