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고려

태조 왕건이 신뢰했던 면천 박씨의 시조 박술희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22. 9. 26.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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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이 신뢰했던 면천 박씨의 시조 박술희 그는 누구인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세운 것은 태조 왕건이지만 이는 그를 뒷받침하는 호족들과 충신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왕건의 밑에는 듬직하고 유능한 신하들이 많았지만 말년에 왕건은 박술희를 특히나 신뢰하여 자신의 아들이자 태자였으며 고려 2대왕 혜종을 보필토록 했으며, 왕건 자신이 후대에 남기는 유언인 훈요십조를 박술희를 통해 남기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토록 왕건의 총애를 받은 박술희는 누구일까?

드라마 태조왕건 박술희

 |박술희는 누구? 출생과 성장

박술희는 면천 박씨의 시조로 언제 태어났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 박술희의 가문은 지금의 당진시에 자리잡고 있는 호족 가문이었다. 박술희는 어렸을 때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용맹하여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궁예의 호위병이 되었다. 

 

무예가 출중하여 궁예에게도 신임을 받았던 그는 왕건이 궁예를 무너트리고 왕위에 오를때도 공을 세웠으며 후삼국 전쟁에서도 여러차례 공을 세우며 태조 왕건의 신임을 받기 시작한다. 

|박술희 왕건의 장자 태자 무의 후견인 역할을 맡다 

921년 태조는 나주에 기반을 둔 장화왕후 오씨에게 태어난 장자 무를 태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왕건의 다른 부인들의 집안에 비해 그 세력이 약했던 장화왕후로 인해 신하들 사이에서는 장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태자 무를 왕위에 올리면 안된다는 의견들이 많았다.

그러자 태조 왕건은 태자가 입는 옷이었던 자황포를 장화왕후에게 주고 박술희에게 전하라 말했는데, 이를 보고 왕건의 뜻을 알아차린 박술희는 이때부터 장남 태자 무를 적극적으로 추천하며 강력한 후견인 역할을 맡게 된다. 

 

|박술희와 훈요십조 

태조 왕건의 말년에 사랑은 박술희가 다 독차지 할 정도로 왕건의 박술희에 대한 신뢰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특히 943년 4월 태조 왕건은 자신이 죽을 때를 대비해 고려 왕실에 남기는 교훈이자 유언이었던  훈요십조를 박술희에게 담도록 하였으니 태조 왕건이 얼마나 박술희를 신임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왕건은 군사력을 박술희에게 주어 고려 왕실을 지키게 하였고, 왕권을 노리는 세력들을 견제할 수 있도록 분부했으니 자신의 자녀들보다 박술희를 더 믿고 신뢰 했다.

드라마 제국의아침에서 박술희

 |박술희 혜종의 강력한 후견인

왕건이 죽고 그가 남긴 29명의 왕비 밑에서 태어난 25명의 왕자들은 그야말로 혜종의 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혜종은 병권은 물론 충남 당진의 기반을 둔 박술희의 존재가 필수 였고 박술희 역시 왕건이 자신에게 남긴 유지를 받들어 혜종을 보필하는데 총력을 다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혜종은 몸이 허약하고, 성정이 모질지가 못하여 고려 초, 강력한 왕권을 필요로 하는 왕의 재목은 아니었다. 하지만 박술희는 왕건의 유지를 받들어 혜종의 듬직한 버팀목이 되고 있었다.  

 |왕규와 박술희의 죽음

박술희가 병권을 지니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충주 유씨 세력에 기반을 두며 당시 가장 많은 세력을 거느린 왕요(고려 3대왕 정종), 왕소(고려 4대왕 광종)형제의 권력팽창은 가속화되기 시작한다.

 

특히 서경세력의 핵심이자 왕건의 사촌동생이었던 왕식렴과 결탁하며 그 세력의 크기가 대단했으며 여기에 왕요의 장인이자 옛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 그리고 박수경, 박수문 형제 들도 모두 왕요와 왕소에게 결탁하면서 그세력은 왕권을 위협할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혜종은 왕건의 유지를 받은 박술희에게는 병권을, 또 혜종의 장인인 왕규에게는 정치를 맡겨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자신의 아들에게 왕권을 물려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왕규는 자신의 외손 광주원군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뜬금없이 박술희를 모함해 갑곶(강화도)으로 유배를 보내고 자객을 보내어 박술희를 유배지에서 암살했다고 전하고 있다.  

- 왕규가 박술희를 죽였을까?

왕규가 박술희를 죽였다는 <고려사>의 기록은 당시의 역사를 쓴 정종과 광종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에 신뢰할 수 없다.

 

예컨데 왕규는 본인이 무장출신도 아닌데다 박술희와 대립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군사적 기반을 잃는것을 뜻하는 것임에도 무리하게 외손자를 왕위에 올리고자 박술희를 모함하여 유배보내고 군사를 보내 암살했다는 것은 신뢰가 떨어지는 일이다. 박술희의 군사력을 잃는다면 저 무섭게 팽창하는 왕요와 왕소 형제에게 모든 것을 내주는 꼴이 되기 때문에 말이 안된다. 

 

또한 왕규가 애초에 혜종의 뒤를 이어 자신의 외손자를 왕위에 올리겠다는 마음을 현실화 할 경우 쟁쟁한 동생이 이미 줄을 서고 있는 상황에서 모든 호족들의 민심을 다 잃어버릴 수고 적으로 돌리는 상황이기 때문에 군사 기반도 없는 왕규가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왕위에 올린다는 것은 현실이 불가능한 시나리오로 알고 있었으니 모반을 꾀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 호족의 신임을 등에 업은 정종과 광종이라는 승리자의 입장에서 쓰다 보니 박술희의 죽음은 물론 당시 모반을 꾀했다는 모든 것을 왕규에게 덮어 씌우고자 함이 오히려 정답일 것이다. 특히 정종과 광종의 세력에게 박술희는 혜종의 무력적 기반이었으므로 왕규보다 오히려 더 빨리 제거 해야했고 이를 뜬금없이 왕규에게 모두 덮어씌웠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갑자기 병사한 혜종도 왕규도 그리고 박술희도 모두 정종과 광종 그리고 서경의 왕식렴 세력에게 제거당한 것이며 이 역사를 그들의 시각과 왜곡으로 작성했기 때문에 박술희가 왕규에게 죽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다. 


박술희의 묘는 현재 경기도 의정부 민락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혜종의 묘역에 배향되어 있다. 평생을 태조 왕건과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살고자 했던 박술희... 그의 죽음의 진실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그는 태조 왕건의 유지를 끝까지 받들고 고려 왕조를 지키려 했던 충신이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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