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고려

후삼국의 전세를 바꾼 고창전투와 안동 권씨의 시조 권행은 누구?

윤여시 2022. 9. 12.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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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의 전세를 바꾼 고창전투와 안동 권씨의 시조 권행은 누구?

천년 사직 신라가 멸망의 길을 걸으면서 시작된 후삼국은 고려의 왕건, 후백제의 견훤의 치열한 세력다툼으로 인해 끝없는 전쟁의 연속이었다. 그중에서도 후백제의 견훤이 몰락하게 된 계기를 마련한 고창전투(지금의 안동)는 그 전까지 잇따라 패배하며 눈물을 삼키던 고려의 왕건에게는 한줄기 빛과 같은 승리였다.

 

그리고 이러한 고창전투의 의미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안동이라는 지명이 생겨났고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안동 장씨가 생겨나게 된다. 과연 고창전투는 어떤 전투였으며 이로 인해 어떻게 안동에 본을 둔 시조가 생겨나게 된 것일까? 

|고창전투는 어떤 전투였나? - 배경

고창전투가 있기 3년 전인 927년, 왕건은 공산 전투에서 신숭겸, 김락 등 명장을 잃고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배하며 삼국의 주도권을 내주게 된다. 특히 공산전투 이후 벌어진 크고 작은 전투에서도 계속 패배하면서 후백제의 견훤은 북진을 거듭하게 되고 마지막 경상도의 요충지라고 할 수 있는 고창(지금의 안동) 공략을 준비하게 된다.  

 

이에 왕건 역시 견훤을 막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고창으로 향하지만 견훤의 기세 등등한 군대에 죽령을 넘어 퇴각을 하게 되고 929년 12월, 견훤은 마침내 고창을 포위하게 된다. 이에 고창에 주둔해있던 고려의 군대 3천은 후백제의 견훤에게 포위된 상황이었다. 

|고창전투는 어떤 전투였나? - 전개 

왕건과 고려군대는 이미 공산전투를 비롯해 계속 패배해 있었기 때문에 죽령을 넘어 고창으로 들어가질 못하고 발만 동동구르고 있었다. 특히 홍유와 공훤 등은 왕건에게 죽령(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청북도 단양군)을 넘어 패배할 경우 다시 퇴각할 수 없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고창을 포기하자고 한다.

 

그러나 이때 유금필은 강력하게 "무기가 흉악한 도구이고, 전쟁이 위험한 것은 당연하다. 때문에 살고자 하기보다는 죽자는 결심을 해야하며 고창의 3천명의 군대를 지키며 싸워야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왕건은 유금필의 의견을 받아들여 죽령을 넘어 고창으로 향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왕건에게 운이 따르기 시작한다. 

 

먼저 당시 고창 인근의 재암성(경북 진보)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 장군 선필이 군대를 이끌고 귀순한 것이다. 당시 선필은 고창 지역의 지리에 밝고 백성들에게 지지를 얻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의 전술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어 천군만마가 다름 없었다. 여기에 당시 김선평, 권행, 장정필 등 지방호족이 속속 왕건을 돕겠다며 나서기 시작하며 전쟁에 필수적인 전술과 지리가 고려에게 좋은 상황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고창전투는 어떤 전투였나? - 결말

고창에 진입한 왕건은 병산에 진지를 구축하였고 견훤은 5백보 앞에 석산에 주둔을 하게 된다. 이후 당시 기세와 병력에서 앞선 견훤이 먼저 선제 공격을 시작한다. 

 

이 전투는 3~4일이 계속되어 펼쳐지는데 후백제가 처음에는 고려군을 밀어내는 것으로 보였으나 앞서 말한 신라 호족들이 고려를 돕고 유금필이 정예기병을 이끌고 견훤의 군대를 박살 내면서 백제군은 그야말로 대패를 하게 된다. 이때 후백제의 전사자가 8천명에 이르렀으며 견훤은 홀로 낙동강을 넘어 퇴각을 하게 된다. 

이 고창전투를 계기로 신라는 완전히 고려를 의지하게 되고 강릉에서 울산에 이르는 신라의 성들이 일제히 투항했으며 지금의 경북 칠곡, 구미 등의 호족들도 왕건을 따르게 되니 그야말로 왕건과 견훤의 전세가 뒤바뀐 어마어마한 승리였다고 할 수 있다. 

 

|고창전투에서 만들어진 안동의 지명

전투에서 이긴 왕건은 자신이 이긴 고창 지역을 '전투 이후 동쪽(신라, 경상도)가 평안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안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한 고려에서는 이 안동의 가치를 중시여겨 고려의 4경에 버금가는 대도호부라 명했고 이는 조선말기인 1897년까지 유지되며 천년동안 대도호부로 불리기 된다. 

 

고창전투는 우리나라의 민속놀이이자 안동에서 시작된 차전놀이를 유래하게 한다. 설에 의하면 왕건이 견훤과 싸울 때 큰나무를 묶어 한 덩어리를 만들어 여러사람이 어깨에 지고 진격하게 했다고 하는데 이를 기념하며 나무묶음을 메고 싸움하다가 우리나라의 민속놀이인 차전놀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고창전투에서 만들어진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안동 장씨 

후삼국의 전세를 뒤바꾼 고창전투의 승리는 단연 유금필과 신라호족들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알고 있었던 왕건은 그 어느때보다 기뻐하였고 자신을 도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행, 김선평, 장정필에게 삼태사(왕의 스승)라 칭하며 안동을 본으로 하는 성씨를 하사했다. 

 

그 중 김행은 "능히 기마술에 밝고 권도에 통달하다'는 뜻으로 '능병기달권'이라 하며 안동 권씨의 성을 하사하며 권행으로 불리게 되고 이가 바로 지금의 안동 권씨의 시조가 된다. 그래서일까 지금의 안동은 안동 김씨와 안동 권씨가 정말 많은데 특히 안동 권씨의 족보 <성화보>는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차전놀이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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